수단이라고 했을때 혹시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정답부터 말하면 그 나라가 맞다. 수단은 남수단 북수단으로 나누어져서 오랜기간 내전으로 국토가 황폐화가 되고 엉망으로 치닫고 있던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였으며, 어설프게 통일을 선언하지만 과거사를 묻어둔 채로 갈등이 남은 통일은 시한 폭탄이나 다름 없었다.
이태석 신부는 의대를 나와 의사 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가톨릭 신부가 되어서 이런 수단으로 가게 된다.
이때 신부님께서 봉사하신 곳은 남수단인데 당시에는 남수단이 독립하기 전이었다.
아무튼 작년 2019년 4월 11일 수단에서 일어난 쿠데타로 돌아가보자
2019년까지 30년을 집권했던 독재자 오마르 알 바시르는 연금에 처해졌고
국방부 장관이었고 부통령인 아메드 아와드 이븐 아우프 장군은 쿠데타에 성공했음을 발표했다.
쿠데타 성공과 함께 민정이양 군사위원회를 설립한 이븐 아우프는 공항 및 정부청사 폐쇄, 잠정 취재금지, 통금 등의 긴급조치를 발표했다.
하지만 불과 하루만에 이븐 아우프는 정권이양 군사위원회 의장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다.
이븐 아우프의 후임으로는 압델라만 부르한 장군이 취임했다.
4월11일에 최고권력을 잡았다고 12일에 그걸 내놓은 문자 그대로의 1일천하였다.
이런 쿠데타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 수단이 어떤 나라인지 먼저 알아보자
수단의 수도는 하르툼(Khartoum)이다. 2011년 독립한 남수단의 수도는 주바(Juba)이다.
수단은 이집트와 달리 강경한 이슬람 국가이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나일강이 흐르긴 하지만 비옥한 건 하류(이집트) 쪽 뿐이고 수단의 상류지역은 별로 비옥하지 않다.
석유가 개발되기 전까지 수단인들은 주로 유목민들이었다.
이런 극성 무슬림이 다스리는 동네라서 그런지 아프리카 중에서도 외세에 대한 저항이 남달리 심했던 곳이며 영국군이 원주민에게 패배한 지역들 중 하나이다.
사진은 수단에서 전사한 허버트 스튜어트 장군
수단에서의 참패는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조커로 대박을 터뜨리기 전의 히스 레저가 주연을 맡은 영화 Four Feathers도 영국군의 수단에서의 참패가 미치는 영향을 소재로 했다. (영화 자체는 별로 재미없음)
대영제국은 간신히 수단에 식민지를 건설했지만 원리주의 무슬림에게 큰 저항을 받는다.
영국군의 '위에서 명령 내려왔으니까 토 달지마'식의 탑다운 지휘 체계는 수시로 수단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윈스턴 처칠이 청년 장교 시절 수단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The River War"라는 책을 써서 영국군을 비판했다.
처칠은 본래 정치인이 아니라 장군이 되고 싶어했는데도 커리어를 걸고 직접 군을 비판했으니 당시 현장에서 얼마나 빡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처칠이 정치인이 된 다음에 무리한 작전의 대명사인 투르크 제국의 갈리폴리 상륙 작전을 지휘한 것은 아이러니다.
이 역시도 나중에 다뤄보겠다.
아무튼 영국은 수단의 무슬림을 매우 경계했다. 수단은 이슬람교를 믿는 북부와 기독교를 믿는 남부로 나뉜다. 그래서 영국이 식민지에서 주로 써먹던 분할통치를 마찬가지로 실시했다. 아랍어를 쓰며 아랍계가 많은 수단 북부는 이집트와 같이 다스리고 영어를 쓰며 흑인이 많은 남부는 케냐, 우간다 같은 지역들과 같이 다스렸다. 그리고 수단의 무슬림을 철저히 배제하기 시작한다.
1차 수단 내전
그러다가 1945년, 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군은 수단 식민지를 유지할 여력이 없었다. 다른 식민지가 이때를 기점으로 우르르 독립했던것 처럼 수단 역시 독립을 얻을 기회로 보고 수단의 무슬림은 영국 상대로 독립협상을 했는데 옛 수단의 영토를 고스란히 회복하는 게 목적이었다.
한편 수단 남부의 기독교인들은 크게 반발했다. 문화적으로 북부와 어떠한 동질감도 없었기 때문이다. 출생지역만 같을뿐 교육과 문화가 달랐기 때문에 남부는 영국식민지로 남기를 원하였고 따로 나오기를 거부한것이다.
영국의 식민지 뒷처리를 보면 기겁을 하는것 들이 많은데 이번 수단에서도 마찬가지로 처리해버린다. 무슬림 원리주의자들의 편을 들어주고 나몰라라하고 떠나버린 것이다. 그렇게 무슬림은 독립국가 정부 구성에서 남부인들을 철저히 배제했다.
남부 수단사람들은 이런 무슬림 철권통치에 반발하며 1955년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1차 수단 내전이다. 하지만 하르툼의 이슬람 정부는 그 반란을 무시했고 1956년 독립을 선포했다.
남수단인들은 케냐와 우간다의 지원을 받아가며 무장 투쟁을 전개했고 수단 정규군이 당나라 군대였던 탓에 내전은 무려 13년을 끌었다.
수단이 얼마나 막장이었냐면, 내전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권력투쟁이 벌어져 쿠데타가 발생했다. 수단도 남수단의 반란을 진압하던 과정에서 아립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군부가 무슬림을 몰아내겠다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1969년에 가파르 니메이리라는 인물이 무슬림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다. 리비아의 카다피를 숭배하는 인물이었다. 해외 진출에 더 관심이 많았던 니메이리는 내전을 끝맺기 위해 남수단의 반군과 협상을 했다.
지옥의 시작 2차 수단 내전
에티오피아가 중재를 해서 수단 정부와 반군은 협상을 시작했다. 남부에 자치구를 설치하는 걸로 합의를 보고 내전은 막을 내렸다. 막상 이렇게 협상을 맺고 나니까 수단 내부의 무슬림들이 난리가 났다. 이교도들과 협상을 하고 지하드를 포기했다고 니메이리의 인기는 추락을 하게 된다.
거기에 이스라엘 상대로 군대를 일으켰던 니메이리는 전쟁에서도 패배하여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결국 무슬림은 니메이리를 몰아내고 다시 권력을 잡았다. 사디크 알 마디라는 종교지도자 겸 정치인이 수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마디'는 이슬람교의 구세주라는 의미라고 한다.)
알 마디는 샤리아법을 헌법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자치를 인정받고 있던 남부는 샤리아법의 적용에서 제외되었지만 남부의 기독교인들은 불안에 시달렸다. 결국 남부에서는 새로운 반군 조직이 결성되었다. 수단인민해방군(Sudan People's Liberation Army)이다. 중국인민해방군과 이름이 비슷한데 아프리카 진출을 노리던 중국의 지원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모택동주의는 아니다)
그런데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나라 수단답게 알 마디는 오마르 알 바시르 장군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었다.
바시르는 남부의 자치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동일하게 샤리아법을 적용하겠다고 선언했다. 바시르가 갑자기 강경 노선으로 돌아선 데에는 남부 수단의 지하자원을 노렸기 때문이다.
수단 남부에서 유전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대한 부를 북부의 무슬림과 나누고 싶지 않은 건 남수단도 마찬가지라서 결국 내전은 본격화 되었다.
이것이 2차 수단 내전이다. 무려 22년이나 계속되었다. (1983년~2005년)
정규군만으로 남수단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한 바시르는 이슬람 민병대를 동원하여 남수단인들의 저항 의지를 꺾는 초토화 작전을 구사했다. 민간인들을 학살, 강간하기 위헤 투입된 이 이슬람 민병대는 잔자위드(Janjaweed: 말등 위의 악마)라고 불린다.
잔자위드를 활용한 전쟁범죄는 수단 내전을 생지옥 중의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한번쯤 들어보았을 다르푸르 학살 등도 2차 수단 내전 때 발발한 것이다.
영화도 있다. 주연은 빌리 제인(타이타닉), 크리스티나 로켄(터미네이터3)
1차 내전 때 13년, 2차 내전이 22년 수단은 내전으로만 20세기를 지새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5년간 내전에 쑥대밭이 되다 보니 수단이 너무 유명해져서 미국도 남수단의 기독교인들에게 난민 지위를 인정해주었다. 수단 난민들은 다른 무슬림 난민들과 달리 미국사회에 잘 적응했는데 이 때문에 미국 보수파는 미국 사회와 문화적으로 비슷한 기독교 문화권 출신들에게만 난민 지위를 인정해줘야 한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 전쟁은 끝나게 되고 바시르는 국제사회의 압력에 결국 2005년 남수단과 휴전을 맺었다. 그리고 남수단은 독립했다.
수단 국기 (이슬람의 컬러인 녹색과 아랍민족주의를 나타내는 붉은색, 흰색, 검은색 삼색기를 사용)
오마르 알 바시르의 독재 (2005~2019)
국제사회에서는 다르푸르 학살 등 각종 전쟁범죄를 저지른 바시르를 전범으로 기소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지만 바시르는 "수단은 국제형사재판소를 국제기구로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제형사재판소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다"고 거부한다. 결국 수단은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했지만 바시르는 그러거나 말거나 이슬람을 바탕으로 자신을 정치적으로 지켜줄 스폰서들을 찾았다.
일단 이런 독재국가들의 영원한 큰형님, 중국이 있다.
무슬림 원리주의인 사우디와도
이집트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아랍의 봄으로 알려진 독재 축출 및 반정부 시위의 물결은 수단에도 들이닥쳤다. 오죽 급했으면 독실한 수니파를 자처하는 바시르는 시리아로 날아가 알라위파를 믿는 알 아사드와 회담까지 했다. 아랍의 봄에서 살아남은 독재자 알 아사드에게 어떤 이야기를들었을까
시리아와 접촉했다는 것은 러시아에게 SOS를 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다니는 것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는 고깝게 보였다.영국과 전쟁을 했을 정도로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수단의 무슬림들은 "중국만 해도 짜증나는데 왜 러시안들까지 끌어들이나?"하고 반발했다.
게다가 지속된 경제난은 바시르의 인기를 심각하게 저하시켰다.
2010년대의 원자재 값 폭락은 자원을 팔아먹던 모든 독재국가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는데 수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제 침체와 바시르 정부의 뿌리깊은 부정부패로 수단인들의 불만은 고조되고 있었고 반대 시위가 수시로 일어났다.
바시르는 분노한 군중을 달래기 위해 옛날 카다피가 써먹던 민족의식 고양을 시도를한다.
"미국의 NASA와 같은 아프리카인들에 의한 우주개발 프로젝트"를 제안했고 실제로 우주개발연구소를 수단에 설립했다.
*수단의 GDP는 전세계 98위이다.
바시르 축출
군대로 반대파를 억누르며 계속 권력을 유지하던 바시르의 미래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은 사우디에서 압둘라국왕이 승하하고 살만국왕이 즉위하면서부터였다. 살만국왕은 이미 80대의 고령으로 실제 권력은 그의 아들 빈 살만 왕세자가 쥐고 있었다.
카슈끄지(Jamal Khashoggi) 피살 사건과 유가하락의 관계를 알아보자
예멘 반군(후티족)이 사우디아라비아를 공격한 이유를 알아보자
보다 자세한 내용은 위 글 참고
바시르는 예멘 내전에 참전하겠다고 밝히며 빈 살만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하지만 빈 살만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살만국왕이 마중을 나와주기는 했지만 실권자 빈 살만이 만나주지 않으니 어떠한 실무 회의도 할 수 없었다.
바시르가 사우디와 미국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안 수단인들은 더욱 거세게 저항을 했다. 위기에 몰린 바시르는 진압작전이 충분하지 않다고 국방부 장관을 경질하고 이븐 아우프 장군으로 대체했다. 하지만 이븐 아우프는 진압은 커녕 오히려 바시르를 몰아냈다.
그런데 이븐 아우프는 바시르를 축출하기는 했어도 국제형사재판소에 넘기지는 않겠다고 발표했다. 바시르의 실각에 기뻐하던 군중이 그 발표에 이븐 아우프의 사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쿠데타에 성공한지 24시간만에 후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이븐 아우프도 사임했다.
워낙 오랫동안 내전과 독재로 얼룩진 수단에 안정을 찾아올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수단인들은 독재자를 몰아냈다. 아마도 누가 대통령이 되든 바시르보다는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