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쟁이의 낙서장/어지러운 국제 사회 야야기

황제에게 돈을 빌려주는 상인, 푸거가문에 대해서 알아보자

by MinorityOpinion 2019. 8. 25.
728x90

황제와 교황을 주무른 자본가 야코프 푸거를 알아보자

 

야코프 푸거(Jacob Fugger) 1459.03.06 ~ 1525.12.30

 

1459년 3월 6일,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아버지와 어머니 바바라 푸거(Barbara Fugger)의 7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한스 푸거는 그라헨 마을의 농부였으나 아우구스부르크로 이주해 직물상인으로 성공하여 푸거 가문의 기반을 닦는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빈민주택단지 푸거라이(Fuggerei)와 푸거 궁(Fuggerplasat)을 각각 1500년대에 건설한다.
1525년 유언장을 통해 가업을 조카 울리히에게 물려주고 12월 30일 사망한다.

 

 

 

유럽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사람으로 16세기 세계 최고의 거부였다. 단순히 부자라는 수식어로는 그를 설명 할 수 없었다. 사후 재산은 메디치 가문의 10배에 달했고, 그 기록은 19세기 로스차일드 가문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까지 깨지지 않는다. (물론 로스차일드 가문은 씹넘사지만)

 

 

 

황제에게 돈을 빌려준 가문

 

13세기 중엽 유럽의 한복판에 있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에게는 막 결혼할 나이였던 황태자 막시밀리안이 있었다. 왕가의 결혼은 정치적이였기 때문에 왕비감을 물색하는 것이 국가적 사안이였지만 그것보다 황제에게는 더 큰 고민이 있었다. 다름 아닌 결혼비용이었다.

들어오는 세금보다 항상 지출이 많았던 황제는 그 당시 궁전에 고기와 빵을 납품하는 상인들에게 조차 외상이 있을 정도로 돈이 없었던 상태. 그런 어느날 돈때문에 고민했던 황제에게 어느 상인이 궁전에 찾아온다. 바로 남독일의 상업도시 아우스부르크에서 온 울리히 푸거라는 상인이였는데 그는 황제에게 왕가의 결혼비용을 전부 부담하겠다고 약속한다. 왕가의 결혼식비용을 대줄정도로 재력이 대단했던 이 푸거가문은 대채 어떤 가문일까?

 

 

푸거가문이 살았던 아우스부르크

 

거래의 시작

거가문이 살던 아우스부르크는 황제에게자유도시라는 특권을 얻을만큼 상업의 중심지였는데, 상인가문들이 도시의 운영을 결정할 정도로 상인들의 입김이 엄청 쌘 도시였다고 한다. 푸거가문은 원래 소규모로직물 거래를 하던 상인이였는데, 사업을 확장해서 독일전체에 비단과 이국적인 향신료를 거래하고 그 당시 유럽최대의 상업도시였던뉘른베르크베네치아에 분점을 차릴정도의 규모로 성장한다.


이 당시 푸거가문은 앞에서 말한울리히가 회사를 경영했는데, 아마 그는 돈은 없지만 독일의 귀족가문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합스부르크 가의 거래가 이윤이 남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황제에게 앞에 말한 황태자의 결혼비용을 대는 대신 조건을 하나 거는데 그 당시 특권층의 상징이었던"가문의 문장"을 달수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푸거가문의 문장

 

 

프리드리히 3세는 당장 콜했고, 서로 윈윈 이었던 이 거래를 통해 그때부터 합스부르크가문과 푸거가문과의 200년동안 상부상조하는 관계가 성립된다. 실재로는 상인에게 의존하는 관계였지만..;;

 

 

푸거가문의 사무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14세기에 푸거가문에게서 돈을 빌린 귀족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티롤지방의 대공이었던지기스문트도 이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큰 은광을 가지고 있어서동전부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대공이었지만 (옛날에는 은화가 화폐였다)사치스럽고 항상 옆 동네와 전쟁을 벌인탓에 돈이 없었다.


푸거가문은 처음에는 작은 돈을 꺼주다가 점점 고액의 돈을 빌려주었다고 하는데, 그 댓가로광산에서 나오는 은을 싸게 구입할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은을 은시장에 팔아 15 - 40 퍼센트의 이익을 챙겼다고 하는데, 푸거가문에게는 이윤이 남는 장사였지만 대공은 그 거래로 망하게 된다. 1490년결국 대공은 진 빚이 너무 많아서 파산하게 되자 자신의 영토인 티롤을 그 당시 오스트리아 왕이었던 막시밀리안 1세 (전에 푸거가문이 결혼비용을 대준)에게 바쳤다고 하는데


왕은 그 동안의 감사의 표시로 푸거가문에게 광산에서 나오는 은 이외에 또 다른 중요한 자원이었던 동을 독점할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 유럽인들은 동으로 생활도구와 무기를 만들어 동의 수요가 대단했는데 그와 푸거가문의 세금도20년사이에 10배로늘어나게 됬다고... 아우스부르크시는 도시의 돈줄이었던 푸거가문에게 세금특혜를 주었는데 1516년부터는 일정액수만 내게 했다고 한다.
(부자의 위엄)

 

교황과의 커넥션

울리히 푸거가 죽고 동생 야콥 푸거가 푸거가문의 보스가 되었을때 당시 푸거가문은 전유럽을 상대로 거래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부터 남이탈리아까지 헝거리에서 스페인까지 상권을 넓힌 것 외에도 바스코 다가마의 항해를 지원해 거기서 얻은 인도의 향신료를 전유럽에 공급할 정도의 회사로 커졌는데,  문제는 자신들에게 돈을 빌리는 왕들의 지출비용을 커버하기는 충분치는 못한 것이었다.


앞에서 말한 막시밀리안 1세의 예를 들자면 전쟁비용, 다양한 국가행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뽑힐때의 선거비용 
(그 당시 황제는 여러 독일왕들의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고 함) 심지어는 신하들의 연봉까지도 푸거가문이 부담했다고.

 

막시밀리안 1세


늘어만 나는 황제의 지출에 부담감을 느낀 야콥 푸거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투자가들을 모았는데, 이 중에는 교황청의 추기경들이 많았다고 한다. 추기경들과의 거래는 비밀리에 진행됬는데 아무리 탐욕한 추기경들도 겉으로는 청렴해야 보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들킨다면 교회에서 파문되는 위험도 감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교황조차도 그 당시 성배드로대성당을 짓기위해 무엇보다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눈감아 주었다고 한다.  푸거가문은 그 댓가로 교황청의 은행에서 발행되는 화폐를 만들수있는 특권을 얻게되고, 그 당시 교황이 벌였던 면죄부사업 (자신의 이름이 적힌 면죄부를 사면 죄를 용서받아 천국에 간다) 도와 이익을 얻는다. 푸거가문의 지점이 유럽 방방곳곳에 있어서 교황은 꽤 많은 면죄부를 팔수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꼬라지가 눈꼴사나웠던 마르틴 루터는 사람들에게 푸거와 그 회사를 없애버려야 한다며 깠다고 한다.

 

면죄부를 팔던 모습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당시 푸거가문의 위세에 견줄만한 이는 없었다고 한다. 한 예로 유럽왕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그의 부를 뽐내는데 그의 만찬장에서는 20가지의 진귀한 요리가 나왔고 그 중 8가지는 왕들도 구경하지 못했던 생선요리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앞에서 대놓고 " 폐하의 오늘날도 우리가 없었으면 불가능합니다!" 고 윽박지르기도 했다고....

 

황제조차 어려워 했던 야콥 푸거

 

달도 차면 기울고

이렇게 합스부르크가문과의 거래로 승승장구하던 푸거가문이였지만 3대째 이후에는 그 사업이 편탄치가 않았다고 한다. 중상주의 출현으로 유럽으로의 황금 유입이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점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마르틴 루터가 벌인 종교개혁의 여파로 자신들의 사업장의 종업원과 인부들까지도 시위에 참여했고 카톨릭왕들은 개신교왕들과 전쟁질이니 (30년 전쟁)그리고 그 전쟁비용을 부담하기가 버거웠던 것이다. (1년마다 군함 몇백 척을 건조하는 비용) 더군다나 그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합스부르크 가문임) 영국과의 해전에서 진 뒤  스페인왕국은 빚더미에 올라 파산해버렸는데, 스페인이 전쟁에 이길 것이라 예측하고 올인한 푸거가문도 같이 망했다고 한다.

 

 

 

 

푸거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군소 가문에 불과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상, 가톨릭 교회의 대금업 금지 철폐, 면죄부 판매와 종교개혁, 한자동맹 붕괴, 복식 부기 전파, 경제 강국 판도 변화,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으로 인한 농민 전쟁…. 15~16세기 유럽을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가게 만든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푸거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본주의라는 정신`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자유 기업과 규제 없는 자본 시장의 옹호자였고, 돈이 기업가 정신을 고양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금융이라는 마법이야말로 사람들이 의약품과 백신을 개발하고 고층 건물을 지으며 뛰어난 기술을 발명하도록 추동하는 정신임을 알았다. 

게다가 그의 사업 방식은 향후 500년 동안 이어질 자본주의의 토대를 닦았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정치인에게 환심을 샀으며, 돈으로 규정을 바꾸었고, 변호사와 회계사를 거느리며, 정보를 수집해 활용했다. 전 세계 억만장자들이 모두 활용하는 이 부의 법칙을 그는 500년 전에 발명했다.

 

 

푸거는 한마디로 "부 자체를 추구했으며,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최초의 현대적 사업가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