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 참여한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알아보자
서울대학교 교수이자 최근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된 조국을 두고 많은 말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그중에서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단체에서 활동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노맹(앞으로 줄여서 말하겠다)은 어떤 단체인가? 알아보고자 한다.
때는 87년도 4월 CA그룹'(제헌의회그룹)에서 갈라져 나와 결성된 '노동자해방투쟁동맹'이 와해된 뒤,
남은 사람들은 무장봉기에 의한 사회주의혁명을 지도할 새로운 노동자당 건설을 목표로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기로한다.
여기 까지만 보면 독일의 적군파가 떠오른다.
이때 이후 1989년 1월 민족민주혁명론(NDR)을 추종하는 핵심 세력 140명을 규합하여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출범 준비위원회(당시의 명칭으로는 노동조합지도자대회준비위)를 결성하게되는 계기가 된다.
사노맹의 목표는 군사독재정권의 잔재인 노태우 정부의 타도와 사회주의적 제도로의 사회변혁, 진보적인 노동자정당의 건설 등을 목표로 활동한 자생적 비합법 사회주의 전위 조직이다. 약칭으로는 사노맹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법원에서는에서는 사노맹을 조직원이 3천 5백명에 달하는 남로당 이후 최대 규모의 비합법 사회주의 전위조직으로 규정하고있다.
그리고 이 사노맹에 관련된 인물이 바로 조국이다.
간단하게 조국을 소개하자면 서울대 법대 82학번 출신으로
1992년 "사상과 자유"라는 책을 펴내 국보법 폐지 논의를 공론화하는 데 앞장서 온 인물이며
울산대 교수로 재직하던 93년에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산하
'남한사회주의과학원' 사건에 연루, 국보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전적이 있다.
사노맹은 발족 직후부터 홍보와 유인물 배포에 적극적이 었는데 89년 11월 서울시 경찰이 성균관대의 서울민주주의학생총연맹(서민학련)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사노맹 출범선언문을 배포하려던 학생을 적발한데서 단서가 잡힌다.
이후 경찰은 서민학련이 사노맹과 깊이 관련됐다고 보고 수사를 확대하는 한편, 관련자들을 속속 체포하게 되는데, 안기부는 90년 10월 1차 수사중간발표를 통해 핵심조직원 40명을 구속, 총책 백태웅과 사노맹 중앙위원이자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본명 박기평)등을 수배를 한다.
위 사람이 지금의 백태웅이며
특히 이번 문재인 정부 들어서면서 작년 9월 20일 SBS방송에 출연하여
"사노맹 활동을 부정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백태웅 2017년 9월 20일 SBS 인터뷰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eSGmJlI5ReY
과거 백태웅은 이정로라는 가명으로 '노동해방문학'에 '식민지 반자본주의론에 대한 파산선고'
'사회주의 위기의 근원, 고르바쵸프 개혁노선의 우편향 비판' 등 논문을 기고했다.
위의 사진은 그 논문이 기고된 노동해방문학 월간지다.
시인으로 언론에서는 노동자 시인, 또는 저항 시인이라 칭하고 있다.
나는 시집을 잘 안봐서 모르겠는데, 학교 아침마다 박노해 시를 칠판에 적는 선생이 있는 것을 보면 제법 유명한거 같다.
아무튼 안기부의 발표에 의하면 백태웅과 박노해는 89년 2월 무장봉기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을 지도할 노동자당을 결성키로 하고민족민주혁명론(NDR)을 추종자들로 모은 뒤, 같은 해 11월 서울대에서 열린 전노협 주최 건국노동자대회에서
사노맹 결성을 공개 선언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기반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각 사업장에 침투시켜 공장소조를 만들고 조직을 확대하는 이른바 '공장의 혁명 요새화'를 꾀했다고한다.
*소조(小組)활동이란 특정 과목을 중심으로 방과 후에 교 원의 지도를 받으며 예·복습이나 실험실습, 연습 등을 하는 일종의 동아리 성격의 활동을 말한다. 소모임이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이렇게 침투한 사노맹은 노동자들을 배후에서 선동해 임금투쟁을 정치혁명투쟁으로 격화시켜 총파업으로 유도하기도 했으며
결성당시 90년도 중점수행과제로는
'사회주의혁명 선전 선동의 대중적 확산', '노동자계급 주도 합법 민중정당 결성'
'전국 주요공장에 혁명적 사회주의자 공장소조 창출', '학생운동의 노동자계급 동맹세력화'
'독점재벌 재산몰수 국유화', '물가관리민중위원회 설치', '농축산물 수입개방저지' 등을 투쟁 슬로건으로 삼았다고 한다.
사실 사노맹의 노선을 부면 불분명한것이 많다. 소련식인지 중국식인지 아니면 북한의 주체사상인지 말이다. 하지만 공산사회운동을 앞장선것에는 부정을 할 수 없다.
또한 사노맹은 레닌의 '당조직 건설원칙'을 모방해 중앙위원회를 최고지도부로 정하고 그 하위 조직위, 편집위 각지방위를 두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앙위원회는 조선로동중앙위원회가 아닌 사노맹의 중앙위원회를 뜻한다. 그 중앙위원장이 박태웅
여기서 부설조직으로는 남한사회주의과학원, 노동해방연구소, 사회주의학생운동연구소, 민주주의학생연맹이 있어
조직원 파견그룹으로는 민중당, 전노협, 노동해방문학사 등을 두고 철저히 비밀 운영했다고 한다.
사노맹의 실천지도부인 조직위는 조직관리와 재정을 전담하는
사무국과 조직수호, 면학, 유인물, 배포 등을 전담하는 연락국으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연락국들은 무장봉기를 위한 폭발물 개발, 무기탈취계획, 독극물 개발 등의 특수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또한 사노맹은 각 분야 '혁명인자'를 물색해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게 한 뒤, 사상성 비밀활동 능력 등 50여가지 기능에 따라 엄격한 심사를 거쳐 조직원으로 포섭했다고 나온다.
이들은 최대 1년의 사상교육, 체력훈련 등과 함께 '일상용어 음어화', '철저한 안전관리', '조직기밀유지' 등 10대 조직보위수칙을 교육받았다.
서울시내 오피스텔과 상가 등에 10여개의 안가를 확보해 놓고 수사기관의 수색에 대비해 가스총, 도검류, 쇠파이프, 염산등을 비치해 두었으며, 검거 때 문서와 메모지를 즉각 소각 또는 삼키도록 하고 기밀유지를 위해 자살용 독극물 캡슐까지 개발했다고한다.
아무리 봐도 이석기가 떠오른다.
조직자금 마련 수법또한 다양했는데 1인당 최소 3백만원 최대 1천만원씩 책임제로 모금,친지 집을 상대로 털어먹는 강절도, 위장결혼식으로 축의금 수급 속셈학원, 비디오테이프 가게 등을 운영했다고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당시 사노맹 중앙위원 박노해는 91년 3월, 중앙위원장인 백태웅은 92년 4월 다른 조직원 30여명과 함께 검거되었고 계획은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렇게 국가안전기획부의 수사로 1991년 4월 29일 해산당했다.
둘다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확정을 선고 받았으며
특히 사노맹 최고지도부인 백태웅의 검거로 사노맹은 공준분해되며 사건수사도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교육계에도 깊게 침투하여 고등학생도 가리지 않고 포섭하여 사회주의 사상교육을 시켰으며, 이는 남로당이후 최대 반국가단체로 파악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김대중 정권 시절인 1999년 3월 1일자로 특별사면 및 복권 조치를 받았다. 2008년 12월 22일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민보상위)는 "민주 헌정질서 확립에 기여했다"며 사노맹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박기평(필명 박노해)·백태웅씨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조국과 사노맹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조국은 이수성 서울대 법대 교수의 지도로 대학원에 다니던 도중에 박노해, 백태웅, 유시민, 은수미 등이 주도한 사노맹 사건에 가담했다.
이 때문에 후에 1993년 5월, 울산대 교수로 재직 중에 구속되어 11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