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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의 낙서장/편향적인 정치 사회 이야기

일제 강점기, 독립군의 활동을 알아보자

by MinorityOpinion 2019.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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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가 죽여버린 독립운동가들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청산리전투(대첩)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지난번에도 독립군에 대해서 포스팅을 해본적이 있지만, 파벌을 위주로 설명을 한것이다.

 

이번에는 전체 역사와 함께 독립군의 활동을 알아보기 위해서 포스팅을 해본다.

 

봉오동전투에서 청산리전투 그리고 자유시 참변

 

 

 

구한말 많은 독립군과 의병이 일어 나서 해산한 대한제국군을 비롯해 일본군과 싸웠지만 결국 화력과 압도적인 인원에 밀리고 식민상태에 놓이게 된다.

 

독립군은 한반도에서 활동하기 어려우니 북부와 간도, 만주에서 주둔지를 옮기고 이 곳을 기준으로 재정비와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을 펼친다.

 

1920년대에 들면서 숙련된 독립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작지만 전과를 올리기 시작하자, 일본군은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1910년 우리민족 침략을 받았어도 지배는 받지 않았는데 역사상 유례없는 다른민족의 지배아래에 놓이게 된다.

 

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어이없는 죽음과 서울진공 까지 계획했던 대규모 의병군단까지 궤멸해버리고. 남한대토발 작전으로 사실상 한반도내에 일본군과 맞서싸울 한국의 군사력은 더이상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물론 몇몇 의병단이 남아 지속적인 무장투쟁을 행했지만 이도 1910년대 안에 모두 진압되어 버렸다.

 

그나마 남아있던 몇몇 의병군은 모두 만주쪽으로 그 거점을 옮겨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상황에 까지 몰리게 되는데. 독립군들의 노력으로 독립군 기지를 비롯한 한인 사관학교 까지 지어놓고 일본군을 몰아내고 다시 국권을 회복할 기회를 노리게 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20년대 그 활동이 절정에 이르기 까지 한반도 북부지역은 매일매일 독립군과 일본군간의 처절한 혈투가 지속되고 있었는데. 일본군은 이런 독립군들에대해 나름 많이 고심했었다. 소규모지만 피해 누적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독립군의 활동은 1910년대 말에 벌어진 3.1운동의 실패이후 무장투쟁론이 힘을 얻으며 더욱 강해졌는데.

대화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는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만세시위를 한다고 일본이 한반도에 알아서 철수할꺼라고 믿었던 자체가 좀 무리였지만 너무나 많은 민중들이 피를 흘려야했고 희생을 당했다.

 

독립군은 아직까지 하나의 통일된 조직체계는 이루지 못했고 다만 수많은 군소 무장단체로 게릴라전을 주로 펼쳤는데.

주활동지는 간도였지만 간혹 국내 진공작전까지 펼치며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주로 낮에는 산속에 숨어있다가 밤이되면 내려와서 기습을 펼치곤했으며, 주로 일본의 주재소를 공격해 일본의 행정망을 무력화 시키거나 일본군 초소를 공격하며 나름의 투쟁을 이어나갔다.

 

주로 만주나 연해주의 한인 동포 사회의 지원을 받으며 무기와 보급품을 구했고. 간도지역에 많은 한인 주민들이 암암리에 이들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독립군들이 사용한 주요 무기들. 대부분 1910~1920년대 사이 벌어진 1차 세계대전 무기들 또는 일본군으로 부터 노획한 장총으로 무장을 했다.

 

시기적으로 1차 세계대전이 맞물리며 당시 러시아군의 일원으로 싸우기 위해 연해주 지방까지 온 체코 병사들에게 무기를 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참고 : 청산리전투(대첩)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청산리전투(대첩)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손혜원 부친 유공자 의혹,논란 그리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예전에 손혜원 부친 이야기를 하면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노선을 다룬 적이 있었는데 간략하게 했던 이야기가 자유시 참변 때문이었다. 요즘에는 최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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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대담해지는 독립군의 활동에 나름 똥줄이 타기 시작했는지. 일본군이 작정하고 군사작전을 시작한다.

 

원래 이런 일본놈들이 움직이게된 시발점이 된 작은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독립군 조직중 하나인 대한신민군이 함경북도에 주둔중인 일본군 초소를 공격하였고 이를 반격하기 위해 추격했던 일본군 병력을 대한북로독군부 라는 독립군 부대가 다시금 역으로 관광보내는 사건이 벌어졌다. 뭐 가는곳 마다 다른 이름의 독립군이 튀어나오니. 얼마나 크고작은 독립군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을지는 짐작할수도 없다.

 

고만고만한 산적떼정도로 취급했던 독립군에게 역으로 자기 군대가 당해버렸으니 일본군 입장에선 화가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일본군은 토벌작전을 시작한다.

 

 

일본군은 함경북도에 주둔중이던 자국의 제19사단 부대에서 '월광추격대대' 라는 이름의 부대를 만들고 이를 독립군 토벌 부대로 임명하여 두만강을 건너게 되는데. 여기서 황당한건 두만강 너머는 명백히 국제법적으로 중국의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중국에 별다른 통보조차 하지 않은채 무단으로 군사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실상 중국이 완전히 무시당한것이다.

 

아무튼 일본군 병력이 움직였다는 정보는 곧 독립군들에게 들어가게 되었고. 예전과는 규모가 다른 부대에 독립군들은 그동안의 개별싸움이 아닌 연합을 하여 이를 막기로했는데. 홍범도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여 몰려오는 일본군들을 소탕하기로 계획을 세우게한다.

 

홍범도 장군을 필두로한 독립군 지휘관들은 '봉오동' 에서 대대적인 격전을 벌일것을 다짐하고. 작전을 세우게 되는데.

 

 

이때 일본군들은 두만강을 건너면서 부터 한인마을에 대해 닥치는대로 약탈과 유린을 하면서 오고 있었다. 물론 독립군의 씨를 말린다는 명목하에 벌어진 만행이다. 이에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기 위해 유인전을 펼치기로한다.

 

독립군 부대장중 하나인 이화일을 시켜 일부로 일본군을 공격하도록 지시를 하게되는데. 당연히 일본군은 눈앞에 나타난 독립군을 보고 맹공격을 펼쳤고. 이화일은 마치 일본군의 공격에 패한것처럼 속여 후퇴를 거듭.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한다.

 

일본군이 미끼를 문것을 안 홍범도는 봉오동 인근의 모든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자신을 포함한 지휘부는 북봉오동에 서산과 동산 그리고 남산에 각각 독립군 병력을 매복시켜놔. 그리고 일본군을 기다린다.

 

자신들이 함정에 빠졌다는걸 모르는 일본군은 아랫마을부터 초토화를 시키면서 봉오동 안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일본군은 아마 생각보다 전투가 잘풀려서 무척 기분이 좋았을것이다.

 

모던워페어 사망시 나오는 명언 모음

 

모던워페어 사망시 나오는 명언 모음

"A nation reveals itself not only by the men it produces but also by the men it honors, the men it remembers." - John F. Kennedy "국가는, 배출한 위인뿐만이 아니라, 어떤 위인들이 기억해지고 경의가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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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이 순조롭다면 너는 매복에 걸린 것이다.

 

최초의 일본군 척후병들이 나타났을때 남산에 매복중이던 독립군들은 이들을 공격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게 놔두었다. 척후병이 아무탈 없이 지나가자 매복이 없다고 안심한 일본군 본대가 아무 의심없이 매복지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게 되었고. 오직. 이순간만을 위해 기다리고 기다렸던 독립군들이 홍범도의 신호탄과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독립군들이 들고 일어나 총탄을 퍼부어대니 일본군은 쓰러져가며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아무리 강력한 일본군이라 할지라도 사방에서 그것도 유리한 고지와 어둠속에서 모두 점령한 독립군에게 상대가 될수 없었다. 일본군 지휘관들은 우왕좌왕 하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일본군의 피해는 점점 쌓이기만 했지.

 

독립군의 맹렬한 기세에 눌려 일부는 탈영병까지 속출하게 되고. 사방으로 포위 되었기에 후퇴또한 여의치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폭우가 몰아치면서 포위망에 살짝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간신히 후퇴를 하는데 성공한다.

 

무심한 하늘때문에 더많은 일본군을 소탕하지 못한것이 안타까웠지만 이는 한반도 외부에서 일본군을 그것도 대규모로 몰아친 첫 승리이기도 했다. 이때 부상병을 제외한 사살된 일본군만 모두 150여명으로 추정한다.

 

물론 일본군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지금도 150명이라고 하면 1개 중대병력이 넘는데 이 인원이 통째로 날라가면 전방의 지휘관에서는 참패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1920년 6월에 벌어진 이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봉오동 전투였다.

 

 

독립군에게 뜻하지 않은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피꺼솟하다 못해 꼭지가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이에 일본군은 월광추격대대 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대규모의 전투 병력을 투입하여 말그대로 간도와 북부지방을 모조리 초토화 시켜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독립군들의 씨를 말려버릴 생각을 한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명분이 필요했던 거야. 제아무리 중국 영토를 제집처럼 내 맘대로 넘나들은 막가파식의 일본군이라도 남의나라의 영토에 대규모 군사활동을 벌이는건데. 이또한 맘대로 할수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월광추격대대는 그렇게 대규모 부대가 아니었지만 이번엔 그 계획 규모가 달랐기 때문이다. 잘못하다간 독립군 잡을려다 또다시 중국과 전쟁이 날수도 있는 상황이며, 그렇다고 중국이 독립군 토벌에 있어서 일본군에게 협조적이라면 그런것도 아니었다.

 

일본군은 자국의 군대를 투입시키기위해 음모를 하나 꾸미게 되는데. 

 

그것은 이른바 '훈춘사건' 이라 불리는 매우 비극적인 사건이다.

 

(영화 놈놈놈에서 표현된 마적단)

 

만주의 중국등지에서 자체적으로 무장을 하고 다니는 준 군사조직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불렀다. 군소 군사 조직이라는 점에 독립군도 마적단과 같을수 있겠다 하겠지만 독립군은 한인으로 뭉친 저항조직이라는점과 조국의 독립이라는 숭고한 목표로 싸웠다면 이들은 걍 도적떼와 마찬가지인 존재이다.

 

적어도 독립군은 같은 한인 마을을 습격하거나 약탈을 하지않고 오히려 일본군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려고 노력까지 했지만. 이들은 내키는데로 인근 마을과 도시들을 습격하며 약탈과 살인 방화등을 일삼는 조폭과같은 존재였다.

 

일본군은 이 마적단을 이용하기로 하는데. 당시 마적단 두목 하나를 매수하여 국경 인근의 도시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것을 사주한다. 그 도시의 이름은 훈춘성

 

일본군으로부터 짭짤한 선금을 받은 마적 두목은 그해 9월 12일. 오전 5시에 훈춘성으로 쳐들어가  훈춘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이때 살해당한 사람만 해도 중국인 80여명 한국인 7여명으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물론 훈춘성 안에도 자체 병력이 있었으나. 워낙의 기습적인 공격이라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고. 우선 외국인 상점 등을 중점적으로 지키며 마적단을 몰아 내려했으나. 마적단의 강력한 공격에 제대로 전투를 치루지도 못했다. 결국 할만큼 파괴활동을한 마적단은 훈춘성에서 철수했는데. 한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정작 일본군의 명분에 필요한 일본측 피해가 전혀 없었다는게 문제였다. 일본인 사망자는 물론이거니와 일본 경찰서나 일본 영사관은 흠집조차 내지 않았던 것이다.

 

뭔가 자국민에 대한 조금이라도 피해가 있어야 자작극이라도 군사활동에 대한 명분이 생기는건데. 전혀 피해가 없으니 당황한다.

 

 

그럼 한번더 가면 되지 ㅋ

 

1차 습격 사건이 있은지 20일후. 마적단은 이번엔 400명의 마적단을 이끌고 새벽에 기습적으로 훈춘성을 공격한다.. 이때 마적단은 개인 화기는 물론이고 일제로부터 지원받은 기관총 1정과 산포 1문을 갖고 세차게 훈춘성을 공격한다. 병력을 둘로 나눈 마적단은 동문과 서문을 집중공격하여 성문을 뚫는데 성공하였고. 성문에 들어서자마자 득달같이 일본 영사관으로 돌진한다. 물론 이때도 훈춘성엔 중국병력이 주둔하며 일본 영사관을 호위하고 있었으나. 마적단들의 기관총의 화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린다.

 

영사관에 불을지르며 일단 주요 목표를 달성한 마적단은 남은 훈춘성의 관병들을 돌파한후 민간인들을 닥치는대로 살해하기 시작했는데, 물론 이번엔 일본군으로부터 확실하게 다짐을 받았는지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을 저질렀다.

 

이때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일본인 민간인도 십여명이 이들손에 처참히 살해당했다. 하지만 영사관에 있던 일본 관공들은 사전에 연락받은대로 모두 대피한터라 애꿎은 민간인만 살해당한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국민까지 거리낌없이 죽이는 것이다.

 

원하고 원하던 자국민 피해가 일어나자 기회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던 일본군은 재깍 반응하기 시작한다. 일본군은 이번에 쳐들어온 마적단에 한인 독립군뿐만 아니라 러시아. 중국등 온갖 불한당들이 섞여 있었다고 대대적인 여론몰이를 하였고, 물론 마적단들이 여러 국적의 무장집단이 뭉친건 사실이지만 일본군은 출병에대한 확실한 명분과 구실을 만들기위해 이것을 좀더 과장하고 심하게 왜곡했다.

 

결국 그토록 원하던 명분(일단은 마적단으로 부터 자국민 보호)을 얻은 일본군은 한반도내 주둔중이던 일본군 병력 3개 사단을 즉각 출병시킨다.

 

독립군을 모조리 씨를 말리겠다는 목표아래 일본군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만주쪽에 있는 독립군 기지를 파괴하기위해 수색작업을 계속하는것은 물론 독립군들과 긴밀한 협력관계였던 한인 마을에대한 대대적인 학살과 약탈을 서슴치 않았으며

 

한국인 마을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맨앞 사람에게 총을 쏘게 시키고

일왕의 생일잔치를 기념한다며 마을 사람들을 교회로 모아놓고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학살하며.

산채로 생매장 하는 등 이른바 초토화 작전(일명 3광작전. 무조껀 빼앗고. 무조껀 불태우고. 무조껀 죽인다.) 을 하며 무차별 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무려 3개월간 진행된 이같은 초토화 작전에 희생된 한국인만 해도 3만명이 넘는다고한다.

 

아무리 저항군 색출이라고 해도 민간인을 3만명이나 넘게 학살한 일본군은 지금으로 봐도 명백한  전범행위이지만 광기로 가득찬 일본군에게 그런건 아무래도 중요치 않았다.

 

 

 

잠시 과거로 돌아가서. 평화, 외교독립노선에서 무장투쟁독립론이 득세하게 되면서 독립군들은 일본에게 독립선언을 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위해 이들은 보다 많은 무기와 탄약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때마침 독립군에게 좋은 기회가 생긴다.

 

1920년 2월 겨울. 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군의 일원으로  적군과 백군의 지원군으로 와있었던 체코군은 전쟁의 종결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모국이 무너지는 상황을 맞이한다. 거기다 적군과 백군마저 휴전협상에 들어가자 이들은 졸지에 망명부대가 되어버렸고. 더이상 싸울 이유 또한 없어지게 되지. 그래서 이들은 더이상 쓸모없어진 자신들의 무기를 급하게 처분할 방법을 모색하게 되고. 마침 일본군과 결전을 준비하던 독립군과의 목표와 맞물리게 되면서 이들은 무기거래를 한다.

 

체코군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와 탄약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북로군정서'에  판매를 한다. 어느 위치인지는 자세히 안나와 있지만 기록에는 어두운밤. 깊은산속에서 은밀히 무기거래가 이뤄졌다.

 

이때 사들인 물품의 양은 소총 200여정과 그외에 기관총 권총. 탄약등. 상당히 많은 양의 무기를 얻게 되었다.

 

사족으로 이당시 북로군정서의 독립군 전력을 알아보자면. 김좌진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이뤄진 북로군정서는 전병력 1600명.(1920년 그해 기준) 무기는 소총 1300여정에 150개의 권총과 7개의 기관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독립군 부대중 나름 규모가 큰 부대였고.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부대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 였는데 이들은 대한독립군. 의군부. 광복단. 신민단 등의 크고 작은 독립군 부대가 홍범도 장군 아래 연합하여 이뤄진  대부대였다. 이들의 규모는 병력 1400여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력강화를 하며 독립 전쟁을 준비중이던 독립군은 일본군의 대규모 군사작전이 실행되면서 큰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1920년 8월.

 

당시 일본군은 제13사단. 제14사단. 제21사단들을 동원. 3면 포위 작전으로 북간도의 북로군정서를 토벌할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독립군의 전력으로썬 이들을 감당해 낼순 없었다. 마침 중국으로부터의 근거지 이주 권고도 받은 상황이라. 일단 북로군정서는 '안도현' 으로 부대를 이동시켰다.

 

이들의 최종 목표지점은 서북지역의 허룽현(和龍縣), 이도구(二道溝), 삼도구(三道溝)인데. 이곳을 목표로 삼은 이유는 이곳이 매우 험준한 산맥지역일뿐만 아니라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전에도 유리하며 보다 효과적으로 일제로부터 의 공격에 유리하다는 계산에서 나온 계획이었다.

 

안도현으로 이동한 이들은 그곳에서 독립군 서로군정서와 합류를 하게 되고. 이듬해 9월 17일. 다시 이동을 시작한후 10월 10일경 삼도구의 청산리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홍범도 장군(봉오동 전투)의 독립군 부대와 만나 본격적인 일본군에대한 대책 회의를 시작한다.

 

 

 

이들은 현재 간도에서 자행되는 일본군의 만행에 분개하며 간도로의 출병에 대한 안건을 주로 논의했다. 의견은 크게 두가지로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강경론과 아직 때가 아니라는 피전론이 주로 맞선다. 대략 9일간의 회의끝에 결국 피전론이 채택되었는데.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바로 독립군을 추적하며 따라붙은 일본군이 바로 삼도구 인근까지 나타나게 된것이다.

 

김좌진 장군은 일단 병력을 후방으로 급히 후퇴시키고 숨어서 이 일본군의 동태를 지켜봤는데. 장군이 내린 결론은 더 이상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릴수 없다고 판단한다. 결판을 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때까지 최대한 전투를 벌어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과의 격전을 벌이기로 결심하게되는데. 어차피 피할수없는 전투이다.

 

10월 21일. 독립군은 비전투원을 주 구성원으로 이뤄진 제1 제대와 전투원으로 이뤄진 제 2제대를 편성하고 김좌진 장군과 이범석 장군의 지휘아래 청산리 계곡 양쪽에 매복을하여 일본군을 기다리게된다.

 

이때 독립군이 매복한 계곡은 상당히 울창한 숲속으로 겨우 통행이 가능할정도의 험준한 지형을 갖고 있었는데. 김좌진 장군은 이런 완벽한 매복지형에 일본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끼작전을 펼치게 된다. 인근 마을 주민과 노인들을 사주하여. 일본군에게 허위사실을 퍼뜨리도록했다. 바로 일본군에게. '독립군은 도망가기 바쁘다' 였다.

 

이런 허항된 소문에 신이난 일본군은 빠르게 진군을 하였다.

 

오전 9시경. 이 좁디 좁은 계곡에 일본군 선봉 추격대가 겨우 비집고 들어서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이 일제히 조준 사격을하며 이 추격대를 단번에 전멸시키게 된다.

 

뒤이어 본대가 서둘러 도착하고 이 계곡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지게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곳은 겨우 통행이 가능할 정도의 아주 울창한 숲속이었고. 이미 유리한 고지는 독립군이 죄다 차지한 상태에서 일본군은 독립군의 상대가 될수 없었다. 이때 매복에 걸린 일본군은 부랴부랴 병력을 새로 편성하며 매복진지로 올라가 독립군의 틈새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지만 이 역시도 매복지에서 쏟아지는 독립군의 조준사격에 실패하고 만다. 야마타가 이끄는 일본군 본대는 머리위에서 쏟아지는 독립군의 세찬 총알 세례에 200여명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남기고 서둘러 후퇴를 하게된다.

 

패퇴하는 일본군을 보며 김좌진 장군은 궂이 일본군을 추격하지 말라고 하고. 일단 병력을 갑산촌 마을로 철수하도록 명령을내린다.

 

 

일본군과의 첫 교전에서 큰 승리를 거둔 바로 그때. 그리 멀지않는 이도구와 완루구에서도 독립군과 일본군과의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와 일본군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부대는 남북에서 일본군의 포위망에 잡혀 큰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신속히 이들의 포위망에 빠져나온 독립군은 이후 서둘려 합류한 다른 독립군 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 본대의중앙부를 공격하는데 성공하게된다.

 

물론 이때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처절히 싸운 독립군 장병들의 숭고한 결의도 한몫했지만  당시 일본군은 아군사격을 하였다. 독립군의 군복과 일본군의 군복이 상당히 닮은데다, 어둠속이어서 구별이 더욱 안되었다.

 

이 전투는 상당히 길게 지속되서 반나절 가량 전투가 지속됬는데. 이때 일본군은 사상자만 400여명으로 전멸급의 대패를 당한다. 한편. 전날의 큰 전투를 치루고 갑산촌 마을로 들어와 다시 전열을 재정비 하던 김좌진 장군의 제1,2 제대는 22일 새벽. 인근 어랑촌에 일본군 기병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마을주민의 제보를 입수한다.

 

허리띠를 졸라맬 틈도 없이 서둘러 병력을 이동시킨 김좌진 장군은 그곳에 있던 일본군 기병대를 진짜 있는 말그대로 밑도 끝도없이 공격하여 모조리 전멸시켜 버린다. 어랑촌에서 일본 기병대를 물리친 김좌진 장군은 아군의 거듭된 승리와 함께. 이제곧 일본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할것이라 예상하게된다.

 

김좌진 장군은 바로 부대 병력을 어랑촌 고지에 배치시켜놓고. 곧있을 일본군의 총반격에 대비하도록 했다. 그날 오전 9시. 김좌진 장군의 예상대로 일본군은 대군을 이끌고 총반격전에 나선다.

 

독립군의 강력한 수비에 시간이 가도 이들이 뚫리지않자 점점 공격하는 일본군은 지쳐가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소식을 받고 도착한 홍범도 장군의 병력도 이 전투에 합류하면서 서서히 전투는 독립군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이전투에서도 일본군은 독립군을 궤멸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네들이 큰 피해를 입은채 패퇴를 한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는 어느덧 해가지는 밤까지 진행되었고. 결과적으로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은 자신들을 추격한 일본군 부대를 최종적으로 몰아치며 이날의 전투를 마무리하게된다

 

 

 

이틀간의 거친 대승에도 독립군은 승리를 자축할 여유가 없었다. 끈질기게 포기를 모르는 일본군은 지속적으로 추격대를 보내 독립군을 압박했고 23일부터 청산리 곳곳에선 독립군과 일본군간의 산별적인 교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독립군은 더 높고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기위해 하천을 따라 더더욱 상류지역으로 이동을 하였고. 일본군역시 독립군을 쫒아 추격하는 형국이 매일 지속되었다. 그러다 10월 25일. 독립군의 흔적을 쫒아 추격하던 일본군은 마침내 독립군이 주둔하고 있는 야영지를  발견하게 되었고. 일본은 기습을 하며 독립군을 공격한다.

 

기습을 당한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어둠속으로 각기 흩어지게 되고. 뿔뿔히 흩어진 독립군은 다시 모여 재정비를 하고 이번엔 반대로 자신들의 야영지를 점령한 일본군을 포위하여 공격을 시작한다.

 

야영지를 포위하여 어둠속에서 총격을 가하자 일본군은 크게 당황하게 되고. 또 역시 크게 패한채 이번엔 독립군에게 쫒기는 처지가 되어 부랴부랴 도망을 쳤다. 독립군은 이런 일본군을 추격하며 계속 공격을 퍼부었으나. 안도현 까지 후퇴한 일본군이 제대로 방어태세를 갖추자 독립군은 더 이상의 추격을 멈춘채 후퇴한다.

 

그후로 일본군과의 크고 작은 교전은 계속 되었지만 결국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은 고사 하고 오히려 독립군에게 수많은 사상자와 큰 피해를 입고 결국 철수를 한다.

 

 

 

이 모든 전투를 통틀어 '청산리 대첩'이라고 부른다. 많은이들이 가끔 오해 하는것이 청산리 전투는 딱 한번의 큰 교전이 아닌 21일 첫 교전부터 시작하여 26일까지 일어난 10여차례의 크고작은 전투를 총칭하는 대첩이다.

 

 

 

 

청산리 전투이후 일본군 사상자 수는 일본군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명 으로 독립군 사상자는 100여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이게 한국측과 일본측 통계가 다른데. 극단적으로 어떤데서는 일본군 사상자가 3000명을 넘었다는 말이 있지만 일본군의 사상자는 840명 정도라고 한다.

 

 

 

독립군에게 크게 당한 일본군은 힘없이 패퇴했고 그 모습을 보며 독립군은 동지들을 서로 부둥켜 안으며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을것이다. 본격적인 일체의 침략이 시작된이후 경술국치의 역사가 시작되며 일제의 지배를 받기까지. 수많은 저항군과 애국지사들이 일본과 맞서싸웠지만 이만큼 커다란 승리는 또 없었다. 기적과 같은 승리라 할 수 있다.

 

일본군에 비하면 부족한 개인화기. 부족한 물자.부족한 병력. 모든면에서 일본군에 비하면 열세였지. 그런 일본군에 맞서 크게 승리를 하였고 그전 일본과 싸우다 죽어간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넋을 조금이라도 위로를 해줬을지 모른다.

 

 

 

청산리 대첩에서 독립군에게 크게 패한 일본은 한반도내에서의 점령자인 자신들 입지와. 대내외 적인  입지를 위해서라도 이제 독립군은 그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박멸해야할 주적이 되어버렸다. 이에 일본군은 독립군과의 전투 패배에대한 화풀이성 또는 보복. 또 아니면 경고차원에서 간도에서의 간악한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한마디로 독립군이 일본군과 싸워 이기면 자신들이 당한 피해의 몇배 몇십배의 인명을 애꿎은 민간인들 학살로 그 보복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일본군은 애꿎은 한인들을 온갖수단을 동원해 가며 학살을 일삼기 시작한다. 3광작전은 그야말로 학살을 위한 학살을 위해 만들어진 작전으로. 무조껀 빼앗고 무조껀 죽이고 무조껀 불태운다.

 

말그대로 풀뿌리도 남기지않는 초토화 작전을 펼친다. 이것을 간도 참변이라고 부른다.

 

 

민간인들을 이렇게 잔혹하게 학살하는 한편. 일본군은 5만명의 대 병력을 투입하여 다시금 독립군을 압박해 나가기 시작했고. 아무리 지형적 조건이 좋다한들 10배가 훨씬 넘는 병력과 맞서싸우기엔 너무나 큰 무리가 따랐기에  독립군은 어쩔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일본군을 피해 후퇴를 한다.

 

이때 독립군은 점점 압박을 해오는 일본군에 맞서 조직과 병력을 한대로 통합하는데 의견을 맞췄고. 이동중 미산이라는 지역에서 대대적인 독립군의 편성과 재조직을 거치며 대한독립군단 이라는 하나의 군대로 통합 편성하게된다. 이때의 총병력은 3500명으로 1개의 여단과 3개의 대대 9개 중대를 비롯한 27개의 소대를 갖추는 나름 규모가 있는 군대로 정비되었다.

 

미산에서 그해 겨울을 지내고 일본군의 총부리를 피해 일단은 자유시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대한독립군단 말고도 많은 독립군들이나 저항조직들이 러시아의 자유시로 향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왜 자유시로 향했는지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자유시는 러시아의 이름으론 스보보드니 라고 하는데 러시아 말로 자유를 뜻한다고 한다. 이 당시 러시아는 공산혁명으로 인한 내전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공산당인 적군과 그 반대인 백군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형국이었고. 이에 망명와 있던 체코군까지 뒷통수를 치고 반란을 일으키는등. 그야말로 혼돈과 파괴의 현장 그 자체였다.

 

일본이 공식적으로 백군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물론 일본군은 백군을 지지하는것과 동시에 또다른 파병 명분으로 그일대의 독립군을 완전히 전멸시키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니 독립군 입장에서 일본군이 지원하는 백군은 곧 적이고. 그의 반대되는 적군은 우리편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적의적은 우리편이다 같은 말처럼, 거기에 실제로 적군은 독립군에게 우호메세지를 보내었다.

 

자신들을 도와 백군과 싸워주면 독립에대한 지원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언제나 일본군에 비해 큰 전력적 열세에 시달린 독립군에게 이만큼 솔깃한 제안이 있을수 없었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도 일본군이 시베리아 까지 진출하여 자신들을 압박해 나가니 독립군 입장에서도 적군과 손을 잡는건 필요했다.

 

당시 연해주에 있었던 대한국민의회(이것도 나름 임시정부.) 에서 자유시에 독립군 주둔지 까지 마련해 주는 등

만주와 간도에 흩어져있던 독립군들의 집결을 촉구했다.

 

 

 

1921년 1월. 자유시로 향하던 독립군들이 하나둘 자유시로 집결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병력을 하나로 재편성하여 통일된 힘으로 항일전선을 수행하고 더나아가 적군의 지원으로 일본군을 몰아내며 이후의 자치권을 인정받는것을 주목표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독립군은 적군으로부터 러시아의 훈련장교까지 지원받으며 보다 체계적인 군사훈련까지 받으며. 보다 전력강화에 열을 올리게 되었고. 끝없는 일본과의 전쟁에 미약하게나마 희망의 빛이 보이는듯 하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커다란 비극이 독립군에게 몰아닥치는데

 

시작은 일단 내부 갈등에서 시작되었다. 통합된 독립군의 군수통제권을 둘러싼 지휘부의 갈등이다.

 

독립군 내부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의 갈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고려 공산당 이라는 조직에 속해있었으나 자유대대는 러시아파 공산파였고 이항군은 상하의 임시정부 공산파 였다. 여기서 왜 공산당이냐 하면 일본이 반공산당을 표방하며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기에 당시의 항일 정신으로 대부분 공산당노선으로 들어갔다고 봐도 맞다.

 

상해의 임정 제1당도 고려 공산당이 차지한것만 봐도 일본의 영향이 무척 컸다고 봐야한다. 여기서 자유대대는 대한국민의회 휘하 무장 병력 부대였으나. 러시아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2 군단에 편입된 한인 부대로 사실상 러시아 부대라고 보면된다.

 

 

자유대대와는 반대의 이항군을 이끌던 박일리아는 군수통제권을 차지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했는데, 박일리아는 극동공화국을 찾아가 그곳에 있던 친 상해파들과 손을 잡고 자신들의 부대는 자유대대에 편입되지 않음을 통보하며 휘하 독립군 부대와 간도에서 온 다른 독립군 부대를 자유시인근 지역으로 이동을 시킨다.

 

그리고 자유대대와 연해주 임시정부와는 별도로 협의도 하지않은채 총사령관과 참모총장들을 멋대로 지정하며, 부대를 사할린 의용대로 개명하고 자유시내의 모든 무장 독립군 부대를 휘하에 두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임명된 총사령관이 제대로 힘을 낼 수는 없었다. 이때 임명된 총사령관은 박창은은 이후 모든 독립군 부대에 총사령관으로써 힘을 행사하려 했으니 실패하였고. 쪽팔렸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얼마후 총사령관직을 사퇴한다.

 

이후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으로. 박일리아를 군사위원장으로 다시 조직개편을 거친후 본격적으로 내부관리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자유대대에 편입된 이항군을 강제로 이동시키는가 하면 다른 부대들고 강제로 이동을 시키게된다. 이에 자유대대는 이들의 명령을 불복하다가 장교들이 체포 당하고 이항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했으며 이후 이들은 지방수비대에 편입되는 사태를 당하게 된다.

 

 

이렇게 첫 군수통제권에 대한 싸움에서 친 상해파가 승리를 거머쥐게된다. 초반에 제대로 당한 자유대대는 당하고만 있을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러시아 코민테른(러시아 정당)과 협의를 하여 독립군 군통수권을 자신들이 가질수있도록 협의를 하였고. 이에 코민테른은 자유대대를 지원하기로 하면서 고려군정회를 조직. 총사령관으로 갈란다라시월린 을 임명하고 독립군 총통수권을 선언하였다. 이에 맞서 박일리아는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들과 협의에 들어갔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자유시로 들어온 갈란다라시월린은 자유시의 모든 부대를 광장에 집결시켜놓고 자신이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박일리아에게 그의 부대를 이끌고 자유시로 돌아오라고 출두 명령을 내린다. 박일리아는 이런 명령에 불응했지만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휘하 독립군은 자유시로 돌아갔고, 연대장인 그레고리예프 마저 투항 하면서 박일리아의 사할린 의용대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후 계속 반항하는 사할린 의용대에게 갈란다라시월린은 초강수를 두기로 결정하는데, 이는 바로. 이들의 완벽한 무장해제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수비부대 제 29연대 소속 병력이 사할린 의용대 부근에 진군하며 이들에게 복종을 권고한다.

 

사할린 의용대는 이들의 권고를 불복하고 반항을 하자 자유시 수비대 제 29연대는 공격명령을 내리며 이들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게 되는데. 사할린 의용대는 이런 29대 연대와 처절한 사투를 벌였지만 포위된 상태에서 집중포화를 받은 사할린 의용대는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이와중에 수많은 독립군 병력이 사살당했고. 전투후 도망자 전사자를 뺀 생존자 840여명은 모조리 적군의 포로가 되는 참극이 벌어졌디.

 

이후 대한독립군은 적군의 휘하 병력으로 흡수되어 이루크츠쿠로 이동당한다. 기록에는 150명 가량의 아까운 독립군 병력이 사살당한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공격명령을 수행한 자유시수비대 병력에 한인 독립군 부대 출신자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독립군 최대 최악의 실점인 자유시 참변

 

게다가 이렇게 과도할 정도의 무력 까지 써가며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단행한 배후에는 바로 일본군의 입김이 존재 했었는데. 독립군을 박멸시키고자 혈안이 되어있던 일본군은 백군을 지원하는것은 물론 적군 내부의  열렬한 외교질까지 해가며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내부 분열에 따른 적절한 통수까지 섞이면서 독립군은 복구하기 힘들만큼 크나큰 전력적 피해를 입는다. 포로로잡힌 독립군 외에 사상자 도망친 자들까지 합치면 오히려 그간 일본군과 싸웠던 피해보다 훨씬 웃돌며, 문제는 이 피해를 입은 병력들이 바로 독립군의 주전력이자 그간 크나큰 전투에서 활약한 배테랑 병력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태로 독립군은 그간 모아놓은 전력의 상당부분 상실하게되고. 간신히 통합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어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위에서 굳이 쓰지않았지만 대한독립군단 초대 총사령관 서일은 이같은 사태에 대한 동지들의 죽음에 크나큰 책임을 표방하며 스스로 자결을 하게 되었고. 

 

 

자유시 사태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건 김좌진 장군은 이후 공산주의자들을 배척하며 다시금 독립군의 재정비 및 재 추진을 진행하였으나, 위기를 느낀 공산주의자들이 김좌진장군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이후 김좌진 장군이 이끌었던 북로군정서는 완강한 반공의 노선을 걷게 되었으나 이후 수많은 지휘 간부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피살되었으며 끝까지 반공노선을 굽히지 않던 수많은 독립투사들도 이 공산주의자 손에 살해당한다.

 

공산주의자가 죽여버린 독립운동가들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공산주의자가 죽여버린 독립운동가들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손혜원 부친 유공자 의혹,논란 그리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공산/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했다고 이야기 했는데, 사실 몇건의 암살이 더 있었기에 정리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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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의 영광스런 북로군정서는 그렇게 몰락한다.

 

일본군이 아닌 같은 민족의 손에 이렇게 무너질줄 누가 알았을까. 자신과의 사상이 다르다며 같은 민족의 영웅들을 살해한 공산주의자들이 과연 같이 민족이라고 볼수있을까?

 

홍범도 장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유시 참변이후 적군에게 구금되어 강제로 적군 부대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강제 이동을 당해 군대에서 밀려나 극장경비원일을하며 연명하다 결국 쓸쓸히 사망한다.

 

독립군의 수많은 영웅과 인재들이 한꺼번에 죽거나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리고 크게 약화된 독립군은 과거와 같이 작게나마 일본군과 직접적으로 싸울지 못할만큼 크게 쇠퇴한다.

 

이 일로 인해서 임시정부에서는 반공노선을 타며,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역시 반공주의자가 되는데 힘을 실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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