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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의 낙서장/사람에 대해서 논하다.

구한말 최후의 선비 이인영에 대해서 알아보자

by MinorityOpinion 2019.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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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최후의 선비 이인영에 대해서 알아보자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국사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드라마틱하고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 시절을 꼽는다면 구한말. 즉 1800년대 후반에서 대한제국 까지 라고 생각한다. 대한제국 이름만 들으면 참 간지나는 국호가 아닐수 없지만 사실 막장까지 치닫은 조선의 허세의 극치라고 본다.

 

 

비록 자주적인 생각으로 다른 외세에 대항해 독립성을 강조하며 이뤄진 결과라고도 생각할수 있지만. 실제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의 행보를 보면 이만한 막장이 또 있을수가 없다. 대한제국의 막장 정치질을 서술하면 너무 글이 길어지기 때문에 줄이지만 하지만 국사책을 조금이라도 본 보았다면 얼마나 허상의 극치라는것을 알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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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변하였지만 아직 공자왈 맹자왈하던 성리학과 유교 사상에 벗어나지 못하며 시대가 변하였지만 예전 사고방식으로 덤벼들었다.

 

그러한 유교와 성리학의 결정체로 일을 그르친 구한말 최후의 선비에 대해서 말하고자한다.

 

 

아마 처음 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도 고등학교때 한국사를 배우면서 얼핏 나온것도 같지만 아무래도 다른, 안중근 의사나 다른 유명한 독립운동가들 과는 달리 얼굴이나 업적이 크게 알려진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국사책에도 보면 그렇게 길게 서술되어 있지도 않다.

 

하지만 이 양반의 직책은 매우 엄청났는데, 무려 구한말 에 13도 의병연합의 총대장으로. 사실상 그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모든 의병들의 총사령관이라고 봐도 무방할정도였다. 이때는 의병말고도 일제의 군대 해산령에 반발한 대한제국군 들도 상당수 가담했다고 하니 사실상 의병이라기 보단 훈련된 하나의 군대로 봐도 무방할정도 였었고. 역사에서도 이때를 기점으로 더이상 의병활동이 아닌 '전쟁' 이라고 까지 칭한다. 당시 이때 병력수만 해도 1만 가까이 된다고 하니 가히 어마어마했다.

 

물론 그가 최초 의병을 일으켰던것은 구한말 보다 훨씬 전인 1895년. 민비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분노한 여러 동지들과 27세의 젊은 나이에 500여명에 이르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싸운 전적이 있다. 물론 맨첫부분에 걸어둔 링크를 보면 알겠지만 민비는 지금에 와서 엄청 많이 미화된 인물이다. 당시 민중들도 민비가 끔살당했을때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다고 할정도였다.

 

하지만 분명한건 한나라의 국모를 시해한것은 명백한 주권침해라는 점이며, 충과 효를 강조하는 당시 유교사상에서 볼때 많은 선비들을 들끓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민비시해 배후는 흥선대원군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튼 이 이인영이라는 사람은 군인 아닌 서채에 앉아 공자왈 맹자왈 하던 하던 선비였었다.

그래도 공부는 잘했는지 나름 그 지역에선 문학가로써 어느정도 명성을 알리고 있었다고본다. 

 

 

그가 일으킨 의병수는 대략 500여명으로 일본군과 여러차례 전투를 치루게 되지.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나라를 위해 일어선 의병장중 한명이라고 생각할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생업이나 모든걸 집어던지고 죽을수도 있는 전장에 의병들을 이끌고 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다.

이후 그의 초창기 의병활동은 1년후인 고종이 내린 의병해산령으로 의병을 해산하고 은둔한다. 마음같아선 일본인들에대한 분노가 끓고 있었을테지만. 지고하고 지고하신 국왕께서 직접 명령하신거니 어쩌겠는가 그게 유교인데

 

이후 산속에서 오랜시간동안 은든하게 되었는데. 

 

 

나라는 그동안 일본에게 야곰야곰 삼켜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대한제국이 선포된이후 몇년후. 차례차례 나라에대한  자주권이 점점 일본에게 넘어가게 되더니 결국 을사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일본에 의해 박탈당한다

 

이후 일본은 황제였던 고종을 끌어내서 황제자리에 폐위 시키는등. 유생들과 전국적인 선비들이 심경을 건들였고 이때 수많은 의병들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구하자는 구국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때 강원도 등지에서 의병2천 명을 이끈 몇몇 의병장들이 병력을 이끌고 이 은둔하고 있던 이인영을 찾아가대장자리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한다.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에 정말 멋진 장면이 아닐수없다.

 

하지만 이인영은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전쟁에 나서는게 겁이나서였는가? 그런 이유가 아니라 이인영은 병들어 생이 얼마 남지 않는 아버지를 두고 전쟁터로 나가지 못했다.

 

나라가 지금 망할 판국인데 여기서 주저했다는것에서 그는 이미 한계를 보여줬다고 본다. 물론 그때 시대상을 비춰볼때 크게 잘못된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몰른다. 하지만 의병장들은 몇날 몇일을 그에게 머물며 그를 간곡하게 설득한다.

 

이때 같이 있었던 이은찬 이라는 의병장은 

 

“이 천붕지복(天崩地覆)의 날을 당하여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자의 은(恩)이 경한데 어찌 자자로서 공사를 미루리오``

 

라는 말로 열심히 설득을한다. 무려 나흘간 계속된 설득에 결국 이인영은 마음을 굳히게 되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들을 따라가게 되는데.

의병 총대장이 된 그는 전국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의 봉기를 부르짖었고. 각나라의 공사관에 일본을 비방하며 조선의 독립을 도와달라 하며 공문을 돌린다. 실제로 그의 이러한 격문은 당시 수많은 국민들과 저항운동가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수많은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게 된다.

이후 그는 1907년 겨울까지 수십차례 일본군들과 전투를 벌이며 나름 훌륭히 의병들을 이끌며. 선전한다. 평생 책만 보던 그가 병법에 대해. 군사에대해 얼마나 정통한 지식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를 따르던 의병의 수도 상당히 많았고. 당시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 분노한 민중들의 많은 지지와 열성적인 의병들의 활동이 그의 활동에 큰 버팀목이 되었다고 본다.

 

한창 전국으로 의병들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하던 이인영은 한가지 큰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한양(서울) 재탈환 이었어. 전국적으로 일본군과 싸운다 한들 한 나라의 심장부인 서울이 일본군에게 먹혀있는 상황에선 아무 소용이 없다고 판단한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탈환에 성공한다면 심리적으로도 큰 효과를 발휘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그는 전국적인 의병들을 모두 총규합해서 서울 재탈환을 위한 총력전을 펼치기로 결심하는데. 마지막 결단을 잘못 내린다.

말로만 들으면 일제의 손으로부터 서울을 탈환하고 불모로 잡힌 황제까지 구한다는 듣기에는 상당히 멋진 계획이라고 볼수있지만. 당시 일본군 핵심 주둔지 또한 서울이었고. 일본군의 전력은 의병에 비해서 월등하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 청일전쟁등 여러 강적들을 차례차례 꺾으며 한창 물이 오른 시기였던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의병들의 전력을 어땠을까를 생각해본다면. 의병들 다수는 의병이라는 이름답게 원래부터 군인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상당수였고. 비록 대한제국군이 합류했다고는 하지만 대한제국군 자체도 원래부터 일제에 비하면 군사적이나 장비나 열세였던도 사실인데다가 보급이나 무기측면에서도 사실상 일본군에 비해 상대가 될수 없었다.

 

원래 상대방과의 전력이 크게 차이가 나면 병법상 가장 기본적으로 제안하는것이 바로 게릴라전이다. 부족한 전력 부족한 장비로 적들에게 총공세를 하는 것은 오히려 적이 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이인영은 이런 병법의 기본중에 기본인 사실조차 무시하고 일본군과 전면전을 준비한다.

명분도 상당히 좋다보니 크게 반대도 없었던걸로 나오는데 사실 그의 밑의 부장들도 다 똑같은 선비 출신이었다는걸 생각해보면.. 명분도 중요하지만 실리를 놓쳐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미 실리마저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이후 의병장들의 만장일치로 그는 진짜 총대장으로 임명이 된후. 경기도 양주에 거점을 마련하여 병력을 집결시킨다. 선봉부대를 차출하여 실제 동대문 부근까지 진격하게 되는데. 이미 일본군은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있었고 주요거점지는 다 차지해 놓은 상황이었다. 의병군들은 정말 목숨을 바쳐가며 열심히 일본군과 싸웠지만 장비의 심각한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후퇴를 한다. 아마 이때 이인영은 일본군의 우세한 전력과 의병으로는 이런 일본군과 맞서 싸워 이기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본다.

게릴라 식으로 의병활동을 하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벽을 그는 느꼈을 것이다.

 

이후 행보를 보고 추측하건데 잘못된 결단을 내리는데 전투에 패배후. 다시 전력을 재정비 할때 그는 갑자기 총대장직 사퇴를 선언한다. 사유는 부친상,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것이 그 이유였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나라는 충과 효중에 효를 아주 중요시하는 민족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제사를 지내는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나.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생각하면 이런 선택은 할 수 없다. 일본군과의 패배로 심리적인 사기 저하와 겨울이라 모두들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인영은 3년상을 치르러 떠난다하고 후임에게 총대장 자리를 내주게 된다. 당연히 의병 수뇌부들은 반대하고 나서며 그를 붙잡았지만 그래도 그는 '효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라를 구할수있느냐?'라는 논리로

 

이라며 의병장들의 손을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의병 조직들은 그대로 붕괴가 되어버리고, 의병장들 상당수는 일본군들에게 체포가 되고. 이인영의 뒤를 이은 총대장도 결국은 일본에게 붙잡힌다. 사실상 1만에 가까웠던 병력이 무너진 것이다.

 

물론 애초부터 전력차가 큰 전투였고. 패배는 예측되어 있는 일이라고 볼수도 있다. 하지만 서울 재탈환이라는 어마어마한 작전을 수립하고 전국의 의병들을 모두 규합해서 일을 크게 벌렸다면 끝을 봐야히잠ㄴ

마무리 하지 못하고 모든걸 내버려둔채 아버지의 부고를 위해 고향으로 걍 가버렸다는 것이다.

 

결과적인 패배가 이인영 혼자만의 책임이라고 볼수없지만, 그의 갑작스런 총대장 사임이후 내부에서 벌어졌을 내부 분열과 병사들의 사기 저하를 생각하면 그의 선택이 불러온 후폭풍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여기에 그는 총대장 재임시절 평민출신 의병장들에 대해 노골적인 신분차별적인 태도는 선비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참고로 이순신 장군도 왜적과 싸우던때에 어머님의 부고를 듣지만 눈물을 머금고 전쟁터로 나갔다.

성리학과 유교의 관점으로 보면 이순신은 불효자인 셈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순신을 불효자라며 손가락질 하고 욕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사람이 욕을 먹을것이다.

 

다시 이인영으로 돌아가서. 이후 그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3년상을 치루며 성묘를 하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된다. 이후 심문실에서. 일본군이 제사를 지내러간 이유를 물어보았다. 일본군도 이해를 할수 없는 대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인영은 교수형을 선고받고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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