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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의 낙서장/어지러운 국제 사회 야야기

청 제국 중흥 양무운동에 대하여 알아보자

by MinorityOpinion 2019.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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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런 역사 카테고리를 국내/해외로만 뭉텅거려서 분류했는데 좀 다른 방법도 생각해봐야 겠다.

 

 

청제국의 중흥정책에 대해서 써볼까 한다.청 제국 중흥 양무운동에 대하여 알아보자

 

글을 쓰기전에 청 황제랑 신라랑 어떻게 연관있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자 한다.

 

이 주제는 환단고거처럼 국뽕치사량으로 맞은 사람들이 지지하는건데;;

 

첫번째로 애신각라(愛新覺羅)가 신라를 기억하고 사랑한다는 뜻을 갖고있다는데 이는 개소리다.

일단 애신각라란 만주어 아이신 기오로의 음차어다. 아이신은 금(金)을 뜻하고 기오로는 만주어로 부족, 집단을 뜻하는 말인데,  만주의 국가 청나라는 8개의 각라가 이루어진 국가다.

애신각라 이외에 근각라, 서서각라, 서림각라, 통안각라, 아안각라, 호륜각라, 아합각라, 찰라각라등이 있는데 이 부족들도 끝에 각라(覺羅)를 썻으므로 신라의 후예일까? 말도안된다.

당시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 3개의 여진으로 나뉘었는데 서로 금나라의 후예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그리고 청나라 황족은 지금의 길림(吉林)에 위치해 있던 건주여진(建州女眞) 출신으로 여진족 역사에서 그닥 눈에 띄는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에 위치했던 해서여진(海西女眞)이 금나라 황족인 완안부가 있어 금나라의 후예에 가까웠다.

후에 여진을 통일한 청 태조는 자신의 가문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애신각라 즉 금족(金族) 금나라를 잇는다는 성씨를 부여했다는 설도 있다.

설사 저들의 선조가 신라의 후예라고해도 신라가 멸망 했을때가 935년이고 청의 건국은 1636년이다 약 700년의 세월 동안 신라의 정체성을 갖고있었을까?

이미 다른 민족이 되버린거다. 그 논리대로라면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역사고 로마는 유럽의 전역을 지배했는데 나중에 여러 유럽국가로 나뉜다.

그럼 모든 유럽은 이탈리아의 역사인가? 유럽이 로마로부터 여러 국가로 나뉘면서 각자의 역사를 갖고있는 것처럼 

여진족 역시 처음엔 고구려, 발해의 역사였다가 한반도에 고려, 조선이 건국되고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 여진족만의 역사를 갖게 된거다.

약간 과장해서 인간은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로부터 유래 됬으니까 세계 모든 민족이 다 같은 민족이냐는 소리나 다를바가 없다.

 

두번째로 아이신이라는 말이 금(金) 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신라의 김(金)씨를 뜻한다고 하는 주장이있다.

이 주장 역시 청나라가 우리나라 역사라는 주장에 수긍하기 힘든 주장이다.

청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국호를 후금(後金)이라고 했다. 예전 완안(完顔)씨의 금(金)을 잇겠다는 거다. 

금나라 국호도 신라의 왕성(王性)을 따왔다고 하는데 이 역시 개소리

금나라 정사(正史) 금사(金史)에서 금 태조(太祖)가 말하길 '요(遼)는 빈철(賓鐵)을 국호로 삼았다. 요는 빈철의 견고함을 취했지만 결국엔 변괴(變壞)한다. 오직 금(金)만이 불변이고 불괴한다. 금빛은 백색이며, 완안부는 백색을 중히 여긴다.'라고 했다.

이들이 금을 국호로 삼은 이유가 가장 정확한 역사서인 정사에 실려있다.

그리고 사학자가 따로 말하길 완안부는 자기들 생활권에 흐르는 안출호수에서 채취한 사금을 파는것이 유력한 산업이기 때문에 금을 국호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고하다.

금의 국호가 신라의 김씨를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들 보기 좋게 짜맞추기식 논리일 뿐이다.

 

환빠 치사량이상 쳐맞은 국뽕새끼들이 청,금 역사는 한민족의 역사라는건 

1900년대 초반 일본 병신새끼들이 칭기즈칸이 미나모토 요시츠네랑 동일인이라는 개소리랑 비슷한 급의 개소리라고 생각하면된다.

그리고 애초에 고구려, 발해가 멸망한 뒤로는 여진족은 우리랑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다. 

한반도의 역사랑 만주의 역사는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금,청의 역사가 한(韓)민족의 역사라는건 책풍같이 병신새끼들만 주장하고 다니는 개소리일 뿐이다.

 

세번째로 금나라의 태조 완안 아골타의 선조가 김함보의 선조라는 설, 그리고 청 역시 이런 금을 이으므로 우리 나라의 역사라는 것

그렇게 따지면 일본의 천황가는 백제 사람이라는 얘기 다 들어 봤을 것이다. 그럼 일본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라고 가르쳐야 하는가?

그렇게 따지면 일제 강점기가 아니고 일제 통일기인가?

그리고 영국의 왕실은 1701년 앤 여왕이 죽고 독일 귀족 하노버 왕가가 영국왕실로 들어왔는데 그럼 영국역사도 독일의 역사인가?

리고 미국의 역사는 영국인에 의해 이루어진게 누가봐도 명백한데 그럼 미국의 역사는 아직까지도 영국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까?

일반 사람이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그런데 환빠새끼들은 저걸 진리인냥 믿고 다니면서 남들한테 개소리를 하고 다니는거다. 다른 비슷한 비유를 들었을때 말이 안된다면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민족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배우는 이유 중 하나에는 자랑스러운 국가의 역사를 배움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자긍심을 갖는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뭐 딱히 이것에 대해서 크게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지만

그릇되고 과한 민족주의 의식은 남들이 보기에는 눈살이 찌푸려질 뿐이다.

가까운 예로 보면 일본이나 중국의 역사 왜곡하는거 보기가 싫을 것이다.

얘들이 주장하던 말도 안되는 임나 일본부설이나 자기들이 2차 대전때 한 행위를 정당화 시키려들고, 중화주의와 동북공정이다 뭐다 하면서 지들이 보기좋게 역사 포장하는것도 보기좋은가?

환단고기 뽕맞은 애들이야 별반 다를바 없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역사를 바라볼땐 제3의 눈으로 봐야된다고 생각한다. 

그릇되고 과한 민족주의는 오히려 역효과만 가져올 뿐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은 요, 금, 원, 청의 역사는 한족의 역사가 아닌 거란족, 만주족의 역사일 뿐이다.

그리고 만주족은 한족에 흡수 되어버렸으니 없어져버린 민족의 역사지 이게 바로 한(韓)민족의 역사 일 수는 없는거다.

걔들이 중원을 차지했으므로 중원(中原)의 역사라고 할 뿐이다.

 

여기서 중원이란 짱깨 한(漢)족을 지칭하는게 아니고 지금의 중국 화북지방을 지칭하는거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목종(穆宗) 동치제(同治帝) 의황제(毅皇帝) 재위 (1861년~ 1875년) 애신각라 재순(愛新覺羅 載淳)

 

동치제는 묘호를 목(穆)을 받았다. 이 목자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닥 익숙하지 않은 묘호인데 중국에서는 뭐 나름 많이 쓰였다.

군주로서 업적은 뭐.... 그렇게 시원찮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周) 목왕(穆王), 춘추시대 진(晉) 문공(文公)의 귀국을 도와주고 문공 사후(死後)에 패업을 이룬 진(秦)의 목공(穆公) 정도가 그나마 유명한 군주인듯 싶다. 

우리나라에서는 천추태후의 아들인 고려 목종(穆宗)이 있다.

어쨋든 동치제는 청나라에서 가장 단명한 군주로 어머니 자희(慈禧) 태후 한테 재위 내내 시달린 불쌍한 사람이다.

그래도 이 시절 몰락해 가던 청나라가 잠시 중흥의 기치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촛불도 마지막에 한번 확 타오르는 법

청나라의 중흥이라는 말은 겉만 중흥이지 결코 속은 이전과 다를바가 없었던 실패한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1) 동치제의 즉위

아버지 함풍제(咸豊帝)가 30을 겨우 넘긴 젊은 나이에 죽고 어린 아들인 재순(載淳)이 6살에 즉위 했다.

당연히 나이가 어리니까 종실(宗室)의 어른들이 집권할 수 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공친왕(恭親王) 과 태후인 자안(慈安)과 자희(慈禧)가 있어. 태후 둘은 자안,

자희태후라는 이름보다 동태후(東太后), 서태후(西太后)로 더 유명하다.

 

(2) 신유정변

함풍제가 북경에 들어온 영,불 연합군을 피해서 열하(熱河)로 피난가고 황제가 피난간 북경에서는 공친왕이 전쟁의 뒷수습을 하고 있었다.

함풍제랑 공친왕은 제위를 다투던 사이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함풍제가 제위에 오르자 정친왕(鄭親王)의 동생인 숙순(肅順)을 총애했다.

숙순은 태평천국운동 때 좌종당과 증국번을 등용하면서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성공하고, 여러 일을  성공적으로 해결했다.

숙순은 일은 잘 처리 했지만 오만하여 황족들을 무시하고 공친왕이었던 혁흔과 자주 대립했었다고 한다.

함풍제가 죽자 8명의 고명대신에게 어린 동치제를 부탁한다고 하고 죽었는데, 그 이름에 숙순은 있었지만 공친왕은 껴 있지 않았다.

이에 숙순과 공친왕의 반목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공친왕(恭親王)

 

어린 재순이 8명의 고명대신의 보필을 받아 즉위하고 연호를 기상(祺祥)으로 고쳤다.

원래 황제가 어린나이에 등극하게되면 황태후가 섭정하게 됬는데 

이에 숙순은 함풍제의 명을 받아 찬양정무대신이 되어 황태후가 수렴청정하는 것을 반대하기 시작했다. 

동태후는 그렇다 쳐도 서태후는 자기 자식보다 권력이 더 소중했던 인물인데 이 꼴을 볼 수 없었다.

서태후는 숙순과 사이가 안좋았던 공친왕과 손을 잡고 어린 황제의 명을 받고 숙순 등을 숙청해버린다.. 

그리고 권력은 공친왕과 황태후의 손으로 들어갔지. 그리고 기상이었던 연호를 황태후와 황제가 동시에 통치한다고 하여 동치(同治)로 바꾸게 된다.

 

(3) 제국의 중흥 정책

2번의 아편전쟁과 여러 외환을 겪으면서 청 조정내에서도 자신들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강건성세 시절의 천조(天朝)의 국가가 아니라는걸 깨달은 것이다.

태평천국의 난이랑 염군의 난, 회족의 난등 여러 난을 진압한 지방 한족 출신들이 새로운 지배체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들은 무능한 관군을 대신하여 자신들만의 군대를 조직하여 여러 내란을 막았는데

역시 서양과 여러 전쟁을 통해 서양의 우수한 화기를 직접 느껴 청나라도 새로운 점을 개혁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만주족 지배층의 생각과 새로운 한족 지배층의 생각이 맞물려서 여러 개혁을 시도 한다. 

이들의 공통된 생각은 '중국의 정치 제도나 생활방식은 서양보다 우수하지만 단지 화기(火器)와 기술이 밀려서 전쟁에 지고있다'라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 기본 개념으로 하여 개혁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신유정변으로 세력을 잡은 공친왕은 만주 정홍기 소속이었던 문상(文祥)의 도움을 받아 외국교섭을 담당하던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門)을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한족출신의 이홍장(李鴻章), 증국번(曾國番), 좌종당(左宗棠)등의 도움을 받아서 중흥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홍장

 

공친왕을 도왔던 만주 정홍기 출신 문상(文祥),

문상은 서양의 여러 사람들에게 애국자이면서 대외관계에 밝았다는 평을 받았다.

 

1) 제국의 중흥 정책들

<1> 재정의 개편

 

청 정부는 태평 천국의 난과 여러 지방의 내란으로 세금을 정상적으로 거둘수 없게 되었다.

중흥 관료들은 청조의 호부를 개혁하기보다는 새로은 세금 징수법을 개선하여 재정의 확부를 이루려고 하는데

중흥 관료들의 생각에는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 농민들이 농토로 복귀할 것이고 이에 따라 예전처럼 정상적으로 세금을 징수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관리들의 노력으로 동치 연간의 세금 수입은 도광제보다 증가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이금세를 물었는데 이금세는 화물이 지방에서 통과할 때 징수되는 통과세금으로써 청조 재정의 25퍼센트를 차지하는 중요한 재원이었다.

그리고 해관세를 개편하여 외국인을 세무사로 고용한 뒤 해관세를 정확하게 받아내었다.

해관세는 북경조약에 부과된 배상금의 40퍼센트를 갚아내기도 했다.

이밖에 염세를 개편하는 등 청조의 세입을 증가시켜서 국고를 안정시키기 시작한다.

 

<2> 이민 실변 정책

 

이민 실변 정책이란 경제가 발달하고 인구가 집중된 지역의 사람들을 경제가 다른 곳에 비해 낙후되고 인구가 적은 지방으로 이주 시키는 정책으로 예를 들어서 동북의 만주지역, 몽골 지역, 신강(新疆)지역 등이 이런 정책의 대상이었다.

원래 만주나 몽골 지역은 한족의 유입을 정부에서 막았는데 이를 개방하여 그 지방의 발전을 도모했었다.

이민 실변 정책은 지방의 발전 이외에 국경에 인구를 배치하여 수비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고 민족간의 교류와 융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됬다.

황무지를 개간 함으로써 국가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한 정책이었고 특히 국경의 병사는 유입된 유민 가운데 선발하여서 신식 무기를 지급하여 부대를 이끌기도 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 정책으로 몽골족을 고려하지 않아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고 청 조정의 착취, 관리들의 착취 등 여러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2) 군대의 개혁

<1> 육군의 개혁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증국번의 상군, 회북지역에서 염군의 반란을 진압한 이홍장의 회군 좌종당이 조직한 초군(楚軍)등은 무능한 관군을 대신하여 난의 진압을 담당한 한족 출신들의 군사였다. 이중에서 증국번의 상군은 태평천국의 난 이후에 일부만 남기고 해산하여, 이홍장의 회군과 좌종당의 초군이 전력의 핵심이 됬다.

이들은 청나라 정권 유지의 주력 부대가 되었고 용영(勇營)이라 불리웠으며, 1860년대 후반에는 30만의 병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혈연 지연으로 뭉친 용영들은 청의 주력 병력이 되었지만 병부(兵部)의 명령을 듣지않고 자신들의 직속 상관의 명령만 들었다.

이들은 서양의 신식무기로 훈련 받았으며 용영 지휘관들은 총독이나 순무로 임명되어 청 말에 만, 한 관리 비율이 변하기 시작했다. 용영은 정예병인 만큼 대도시나 전략적인 요충지에 녹영군대신 주둔하면서 이들을 방군(防軍)이라 불리우기 시작했다.

 

만주 팔기와 녹영군은 아편전쟁과, 여러 내란으로 무능함이 증명되었지만, 

이들을 해산하면 청조의 실업자 문제에 크게 기여하기 때문에 딱히 해결방안 없이 그 수만 유지하며 세금을 갉아먹고있었다. 이에 문상과 공친왕은 천진에 팔기군 500명을 신기영(新機營)을 조직하여 러시아제 무기로 훈련을 시켰다. 

신기영은 1865년에 병사 3천명으로 늘어났고 공친왕의 동생인 순친왕이 통솔하였으며 1870년에 이르러서는 약 3만명 까지 증가하여 북경의 수비를 담당했다.

그리고 직예에 주둔해있던 15만명의 녹영군에게 근대식 훈련을 시킨 후 이들을 연군(練軍)이라 칭했다.

이들은 한족 신사출신들의 군대인 용영을 모방했지만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았던 청나라 말기의 정예군이었다.

 

하지만 청조의 전력은 용영에 집중되어있기 때문에 반란이나 봉기는 방군이 진압하였고, 녹영병들은 산적과 해적을 체포하는 경찰의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청조의 전력이 한인총독이나 순무들에게 집중되어있기 때문에 청 말 정부는 이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동양 패권국임을 자처하는 청조 군대의 모습 

 

청 말 육군의 모습

 

 

<2> 해군의 창설

청제국 해군의 모습

 

해군은 중흥 정책 초기부터 이미 이야기가 되어지고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된건 1874년에 정일창(丁一昌)이 해양수사장정(海洋水師章程)을 제출한 후부터 이루어지기 시작됬다. 이들은 북양(北洋), 동양(東洋), 남양(南洋)의 3개의 해군을 창설하고, 북양해군은 산동성 직예성의 방위를 동양 해군은 절강성과 강소성의 방위를, 광동성과 복건성의 방위는 남양해군이 담당했다. 

이홍장은 직접 군함을 제조하는 것보다 외국에서 비용이 덜 든다고 하여 영국의 암스트롱사로부터 포선 4척을 구입하고 독일의 크룹 사로부터 정원호(定遠號)와 진원호(鎭遠號)의 두개의 철갑선을 구입한다. 

 

그리고 해군장교를 육성하기 위해 복주선정국의 학생들을 영국과 프랑스에 유학시킨다.

이리하여 11척으로 조직된 복건해군 함대와 18척으로 조직된 남야야 해군 함대, 

18척으로 북양해군 함대를 조직하여 청나라도 해군조직을 갖추게 된다. 

청불전쟁 이후에 청 정부는 해군아문(海軍衙門)을 설립하여 이홍장에게 실권을 준다. 

이홍장은 북경과 광주에 수사학당을  설립하여 해군아문의 관제를 정하고 유공도에 북양수사 학당을 남경에 남양수사학당을 설립하였다.그리고 영국인과 독일인에게 북양해군 함대의 훈련을 담당하였다.

 

진원함. 무장은 30.5cm 20구경 연장포 2기 4문, 15cm 40구경 단장포 4기 4문, 6파운드 속사포 2기 2문, 3파운드 속사포 8기 8문.

정원함. 무장은 305mm 연장포 2기 4문, 150mm 포 2문, 57mm 속사포 2문, 47mm 속사포 2문, 37mm 포 8문, 14인치 어뢰발사관 3문.

(엔하위키 출처)

청나라 해군의 자랑 진원함과 정원함 당대 아시아에서 최고의 철갑선이었다.

 

3) 군수 공장과 기업의 설립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을 겪은 청나라의 관리들은 칼과 창이 서양의 총과 대포를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았어. 

그리하여 양무 관리들은 군수공장의 설립하여 군수공업의 육성을 주장하게 된다. 

증국번은 안경(安慶)에 군계소(軍械所)를 창설하여 서양식 총을 제작하였고 소형 증기선을 한척을 건조하였다. 

이홍장은 상해와 소주에 양포국(洋砲局)을 설립하였다. 

후에 증국번의 동의를 얻어 군계소와 양포국을 합쳐 전국 최대 규모의 강남기기제조총국(江南機器制造總局)을 설립하였다.

 

강남 기기 제조총국

 

1865년 이홍장은 선박의 수리 및 총과 유산 탄포까지 제작할 수 있는 기기철공장(機器鐵工場)을 10만원에 구입한 뒤 

술자들을 초빙하여 각종 기계들을 생산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공예학당(工藝學堂)과 조포학당(操砲學堂) 등을 설립하여 기술자들을 훈련한다.

그리고 또!!! 이홍장은 금릉기기국(金陵機器局)을 설립하여 여러 군수품을 생산에 이홍장의 회군(淮軍)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구통상대신(三口通商大臣)인 숭후(崇厚)는 천진기기국(天津機器局)을 설립하여 여러 무기를 생산했는데 

이 역시 이홍장이 인수하여 북양군에 무기를 제공하기 시작했어. 좌종당은 복건선정국(福建船政局)을 설립하여 북양 해군의 철갑선이 드나들 수 있는 부두를 소유하였고 해군의 배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이밖에 여러 군수공장이 설립되어서 청군의 무기 보급에 기여하였다.

 

청말의 무기 제조하는 모습 남경기기창

 

청불 전쟁에 패배한 청조는 군인의 개편만으로 나라를 강국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았다. 그리고 청나라가 무역수지가 만성 적자인걸 깨닫고 중국인만의 기업을 설립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제조업과 광업, 교통과 통신의 발달을 통해 청을 근대화 하여 산업을 발달시켜야 된다는 것을 깨닫는데 항운업은 초상국을 이홍장이 주청하여 설립하였다.

이는 최초의 비군사성 민간 기업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설립되었는데 결국 이홍장측 관리의 부정축재수단으로 이용되어 버린다.

이 후 여러 열강과의 경쟁에서 낙오되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여러 광산기업을 설립하여서 군수공장과 조선소에 철을 지원하기도 한다. 그리고 철도와 전선을 만들게 되는데 전선은 조선의 인천까지 가설하기도 한다.

 

(4) 중흥 정책의 실패와 그 한계점

 

군대의 근대화와 여러 군수공장의 설립과 세제의 개편 등으로 청 제국은 중흥의 기치를 마련하게 된다.

당시 학자들은 동치제의 중흥 정책이 주(周) 선왕(宣王) 시절 융(戎)을 토벌하여 중흥의 기치를 마련하고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의 한조 중흥과 마찬가지로 볼 정도로 성공적이라고 평가 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정에 만연한 부패하고 자질이 의심스러운 관리들을 처리하지 못하였고, 서태후의 이간질로 양무 관료들간의 대립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중흥 관료들 자신들이 사회적 지위나 특권에 만족 하고있었기 때문에 유교질서의 변화를 원하지도 않았었다. 

특히 중흥 정책에서 가장 집중했던 군제의 개편에도 여러 문제가 있었다.

 

청조 군대의 주력이었던 이홍장의 회군에서 한 번 알아보자.

이홍장은 무비학당(武備學堂)을 설립하여 독일인 교관을 고용한 뒤 

하급 장교등을 앙성했지만 회군의 고급 장교들은 혈연과 지연에 얽매이는 부패한 존재 들이었다.

군대에서 생각해봐라 아무리 하사 소위들이 유능해도 그 위 장교들이 썩으면 어떠냐? 부대 제대로 돌아가나?

딱 그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여러 군수공장을 지었지만 그 무기의 질은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가장 큰 군수공장이었던 강남기기제조총국에서 생산된 대포는 총신이 짧고 멀리 나가지도 못했고 한시간에 7~8발 밖에 쏘지 못했다. 그리고 레밍톤 총 역시 외국산에 비해 질이 떨어져 이홍장 회군에서도 쓰기를 꺼려했었다.

금릉기기국 역시 나은 점이 없었다 한 예로 대고(大沽)에서 생산된 7문의 대포를 시험 발사했는데 3문의 포신이 폭발하여 5명이 즉사한 사건이 있었다. 나머지 4문 역시 폐기처분 되었고 그리고 청일 전쟁당시 청군의  40% 정도는 창, 칼 등 재래식 무기를 사용할 정도로 육군의 개편은 겉으로만 성공했다. 속으로는 중흥 정책을 펼치기 이전과 다를바 없었다. 

 

해군 역시 나을바가 없었는데 훈련은 충실하게 받지 못하고 조직체계에도 문제가 있었다.

남양해군은 증국번의 상군계가 통솔하고 북양해군은 이홍장의 회군계가 통솔하여 독자적인 지휘계통을 가지지 못하였고, 서태후 등 보수파는 이홍장이 해군아문을 창설하여 자금을 모은다고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후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청불전쟁의 패배후 공친왕이 총리아문에서 사임하고 신강에서 작전중인 좌종당에게 모든 자금이 몰리면서 해군의 지원은 열악하게 된다. 

그리고 서태후는 해군 방위비를 건조하여 이화원을 건조 하는 등 오죽하면 청일전쟁 당시 청 해군은 화약대신 모래를 넣었을 정도일까...

 

여기 까지가 청나라의 중흥 정책이다.

원래 청불전쟁과 청일전쟁까지 쓰려고하는데 솔직히 쓰면 엄청난 스압이 될거같고 이 편 역시 그닥 재미있게 읽을수 있는부분이아니어서 여기까지 써본다. 다음편에는 청일전쟁과 청불전쟁을 통하여 양무운동의 실패과정과 동치제의 죽음 의화단 운동까지 쓸까 생각한다

 

참고서적

 

임계순 청사(淸史)

캠브리지 중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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