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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의 낙서장/어지러운 국제 사회 야야기

그리스의 현대사와 경제위기를 알아보자

by MinorityOpinion 2019.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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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현대사를 알아보자

 

최근 우리에게 그리스라고 떠오른거는 EU분쟁과 경제위기 전도였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1944년 10월 나치 독일의 점령이 끝나며 자유를 되찾는다 하지만 그리스는 곧 전쟁의 불길에 휩싸인다

 

 

 

 

그리스는 자유를 되찾자마자 2번의 내전을 겪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리스 왕은 해외로 튀었고, 나치에 맞선것은 공산당원들이였다 공산당원들은 북부 그리스를 장악하고 그리스 국토 대부분을 먹는데 성공한다. 임시정부를 세우고 그리스 왕과 그리스 망명정부를 무효화한다

 

 

 

 

 

그 뒤 공산당과 왕당파들은 연합해 아테네에 연립 정권을 세운다

 

하지만 조합자체가 처음부터 물과 기름이였기에 몇주만에 연정은 해체된다

 

공산당원들은 아테네와 테살로니키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먹었지만

 

결국 12월 내전이 일어나고 영국군이 투입되 진압을 하게 된다.

 

다음해인 1945년 2월, 공산당은 패배를 인정하고 군대를 해산했다

 

1946년 3월 국회의원 선거가 열리게 되고, 왕당파들이 승리하여 파블로스 1세가 그리스 왕에 즉위한다.

 

하지만 이거를 가만보고 있지는 않았다. 남은 공산당원은 이걸 보고 반란을 일으킨다

 

이것을 본 영국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이 격화되던 냉전시절

 

미국은 유럽에서 빠르게 승기를 잡기 위해서 그리스의 공산당을 진입하기로 결정한다.

 

 

 

그리스 공산당은 북부산악지대에 정부를 세웠으며 초기에 그리스 정부군은 진압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하지만 1949년 미국이 그리스 정부군을 지원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이번에는 1949년 10월 다시 공산당은 패배를 인정하고 알바니아로 도망을 간다.

 

 

이 내전으로 5만명이 전사하고 50만명이 난민이 되는 비극이 일어 나게 된다.

 

아무튼 오랜 내전 끝에 그리스는 공산당원과 내전을 끝내고 민주정부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그리스는 미국과 동맹을 맺고 나토에 가입하였으며 공산당을 금지하는등 강경책을 펴며 반공친서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게 된다.

 

 

근데 발칸반도를 보면 알겠지만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등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과는 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된다.

 

 

 

그리스는 내전을 딛고 1960년 ~ 70년대에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는데 미국의 반공정책에 편승하여 경제지원을 받았으며 고대 그리스의 아름다운 자연과 고대 관광업도 크게 부흥하였으며 돈을 벌어 들이기 시작했다.

 

1950년대는 그리스는 연 경제성장률 10%를 찍었으며 이때는 일본에 이어 2위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빈부격차를 심화시켰고 정치계에서 혼란이 가중시켜 1960년대 초번까지 보수정당이 집권했던 정치계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이때부터 자유주의 정권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 그리스 왕에 즉위한 콘스탄티노스 2세는 새로 정권을 잡은 자유주의 성향 정권을 싫어 했고 공개적으로 반대 선언을 한다. 그뒤로 왕과 총리는 빈번하게 충돌하였고 정치계는 혼란에 휩싸인다.

 

왕은 총리를 해임해도 의회는 이미 반왕국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총리임명 - 국왕 불신임 - 임명 - 불신임 같은 병신같은 반복이 있었다.

 

이후 1967년 총선이 예정되었고 사실상 좌파정당의 압승이 점쳤다.

 

 

그리스의 좌파정당이 들어서는것을 우려한 미국은 요르요스 파파도폴로스 소령을 지원하였으며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이 수립하게 된다.

(이때 쿠데타에서 파르테논 신전도 조금 부서졌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선서취임식에 참석하였고, 사실상 이는 쿠데타를 승인하는 행위였다.

 

그리스인들도 정치적 혼란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어 쿠데타에 동정하는 분위기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요르요스는 반정부인사와 공산당원을 잡아들였고 1만명 체포와 6천명이 외딴 섬으로 추방 된다.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시켜버리고 국민들을 감시하는 철권 통치를 한다.

 

하지만 강력한 권력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하는데 우선 정치제제가 안정되었고 그리스 통화인 드라크마에 대한 신뢰도도 높아지게 된다.

 

1961년 ~ 1973년 사이엔느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7.4%였고 재정도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바다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는 해운업도 크게 성장하였으며 50년대와 60년대 건조댄 슈퍼탱커의 상당수가 그리스산이었다고 한다. 해외로 이민간 그리스 노동자들이 그리스로 송금한 돈도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다.

 

 

도시화도 빠르게 진행되었고 건축업도 발전을 한다. 당시 그리스의 시멘트 회사인 Volos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시멘트 회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농업,자영업, 중소기업은 발전하였지만 경제의 질적도약은 실패하였으며 제조업 중심의 산업고도화를 이루지 못해 농업, 해운업, 관광업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형태가 만들어지게 되는데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게 되어 경제의 취약한 부분이 되어버린다.

 

결국 대형 제조업이 성장하기 보다는 소기업과 자영업이 성장하였으며 세금 징수와 성장기반 확보에 큰 단점이 되었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처음에는 쿠데타를 긍정하였으나 시간이 갈 수록 군사정권의 힘이 큰것에 반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1967년 12월 왕당파와 함께 쿠데타를 또 계획하고 실행한다.

 

하지만 망하고 이탈리아로 망명한다.

 

이 쿠데타로 인해서 군사정권은 큰 충격을 받고 정권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

 

농민드르이 부채를 탕감해주는 정책을 펼치는등 좌파 정책을 펼치면서 국민들의 환심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으나

 

정당성은 여전히 결여되었다. 다만 경제는 순항이었기 때문에 군사정권은 그런대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1973년 오일쇼크로 그리스의 경제 급성장도 멈췄고 정권의 정당성을 얻으려고 시행했던 퍼주기 정책도 외국에서 돈을 못빌려와 망하기 일보직전이였다

 

군사정권은 위기를 느끼고 아예 군주제를 폐지하기로 마음먹고 그리스를 공화국으로 바꾸고 요르요스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지만 이는 오히려 경제 악화와 정치적 불안만 키웠다.

 

그리고 당시 미국에서 있던 히피나 유럽의 68혁명 등의 반정부운동에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 반정부운동을 시작한다.

 

1973년 11월엔 아테네 폴리테크닉 대학에서 수천명의 학식충들이 학교를 점거하고 반정부운동에 나섰다.

 

군사정권은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탱크까지 동원하는데

 

하지만 오히려 민간인들이 죽고 약 50명정도가 사상하는 사태가 발생하게되고

 

국민들도 이 사건으로 인해서 친군정이었던 성향이 완전히 반전하게 된다.

 

군부정권은 여론의 반전에 당황하였고 다시금 인기를 끌어보기 위해 1974년 키프러스의 쿠데타에 개입하는 무리수를 두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그리스 해군과 공군이 군사정권에 반기를 들게 한다,

 

결국 요르요스는 자신의 심복이던 디미트리오스 요안니디스에게 체포를당하고 연금된다

 

요르요스는 사형을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1999년 감옥사를 한다.

 

그는 자기가 공산당으로부터 그리스를 구했다고 주장하며 공산당에 패배해서 자신이 감옥에 갇혔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로 망명했던 콘스탄티노스 2세는 군사정권이 끝나자 다시 왕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국민투표에서 그리스 국민 69%가 왕정복고(왕국으로 다시 돌아감)을 반대하여 그는 왕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신민주주의당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

 

그리스는 정당들도 새롭게 창당되었다

 

보수 성향인 신민주주의당과 중도 진보 성향인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이 양당제를 구축하였다.

 

군사정권 종식 후 정권을 잡은건 신민주주의당이였지만 오일쇼크로 경제가 추락하자 신민당도 같이 추락하였고 결국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이 집권한다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은 본격적으로 좌파식 퍼주기 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이 퍼주기가 20년이나 지속되며 그리스 경제추락에 이바지하게 된다.)

 

이후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은 1981년 정권을 잡은 후 2004년까지, 약 20년동안이나 집권하며 (사실 1990년에 신민당이 정권을 잡았는데 인기없는 정책을 펼쳐서 3년만에 바뀐다.) 그리스의 경제를 안정화시키고 국내 안정에도 기여한다

 

1980년 다시 나토에도 가입하였고 1981년엔 EU에도 가입하였다. (그 뒤 2001년엔 유로화도 채택한다) EU에서 인프라와 자금을 지원해주었고, 관광업, 해운업, 서비스업 등이 성장하여 그리스 경제도 다시 안정세를 유지한다.

*근데 여기서 회계를 조작해서 EU에 들어간다.

 

그 뒤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유치했지만 비용이 논란이 되어 결국 2004년 총선에서 신민당에게 정권을 넘겨준다

 

무리한 올림픽유치로 경제부담만 커져버린 아테네 올림픽

 

그리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막대한 빚과 시설비, 비용을 지출하여 재정이 악화된다

 

그리고 1996년부터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썼고 거기에 탈세, 부정행위까지 더해져서 그리스 재정은 더 악화된다.

 

또한 올림픽을 위해 우리돈으로 약 20조원을 써댔고 이로 인해 그리스 재정은 완전히 파탄 직전이 된다.

 

그래도 2008년까지는 부동산 버블이랑 경제성장으로 어찌어찌 넘어가긴 했다

 

 

 

 

하지만 2008년에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의 타격으로 경제가 타격을 받고 청년실업이 가속화되어 2008년 12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이 폭동은 아테네에서 시작되 그리스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1974년 군사정권 종식 이후 그리스 최악의 폭동이 된다

1달동안 계속되다 2009년 1월 끝났다

 

결국 이로인해 신민당은 정권을 잃게되고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으로 정권이 다시 바뀐다.

 

하지만 신민당 정권에서 재정적자를 분식회계 같은걸로 은폐했다는게 알려지자 그리스의 빚은 막대한 양으로 불어나게 된다(사실 숨겨져있던게 드러난것이다)

 

결국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은 운지를 선언하며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다

 

이때부터 그리스는 추락의 길을 걷게 된다

 

 

거기에 2007년과 2009년 연달아서 대규모 산불의 국토의 절반이 불에탄다.

 

 

 

그 뒤에 혜성 같이 나타는 정당인 급진좌파연합이 그리스 국민들에게 인기를 끌게 된다.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그리스 총리에 취임하게 되었고,

 

치프라스는 2015년 7월 유럽연합이 제시한 긴축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국민 투표를 통해 디폴트(채무불이행)과 그렉시트(EU탈퇴)를 하는듯 했으나

 

결국 채권단에 항복한다.

그리고 무디스, S&P, Fitch 3대 신평사 모두 국가신용등급을 디폴트 등급으로 강등했다.

 

 

유로그룹은 그리스에 대한 860억 유로 규모의 제3차 구제금융 지원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1. 그리스 정부는 재정 기초수지를 2015년 -0.25%에서 2016년에는 +0.5%, 2017년 +1.75%, 그리고 2018년에는 3.5%를 달성하도록 한다. 그리스 정부는 3.5% 기초수지 흑자 목표 달성을 위해 탈세방지와 연금 개혁 등 유로그룹과 합의한 재정개혁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특히, 그리스 정부는 은행의 부실정리와 자본보강을 신속히 추진하도록 해야 한다.

 

2. 그리스 정부는 시장가치가 있는 국유자산 및 국영기업 등으로 500억 유로의 민영화기금을 올 연말까지 조성해야 하며, 이를 위해 그리스 정부는 올 10월까지 설립방안을 유로그룹에 제출하도록 한다. 500억 유로의 민영화 기금 중 250억 유로는 그리스 은행들의 자본보강에 투입하며, 125억 유로는 채무상환에 사용되고, 나머지 125억 유로는 경기회복을 위한 투자재원으로 사용된다.

 

3. 유로그룹은 그리스에 대해 향후 3년간에 걸쳐 유럽안정화기금(ESM)을 통해 총 860억 유로의 3차 구제금융을 지원하되, 그리스 정부의 구조개혁 합의사항 이행실적에 따라 분할 지원한다. 여기서 그리스 은행에 대한 지원자금 250억 유로도 포함된다. 첫 번째 지원자금은 260억 유로로, 이 중 100억 유로는 그리스 은행의 자본보강 및 정상화를 위해 즉각 지원하며, 나머지 160억 유로는 10월까지 나누어 지급한다. 두 번째 지원자금 150억 유로는 그리스 은행들의 자본보강 및 정상화를 위해 지원되는데, 11월 15일까지 그리스 은행들의 부실 규모 심치 및 건전성테스트 등을 통해 결정한다.

결국 그리스의 벼랑끝 전술은 통하지 않았다. 처음 국민투표에 붙였을당시 긴축안보다 더 가혹해졌으며 국유자산역시 포함이 되지않았으나 3차에 포함이되어 채권단이 손댈 수 있게 되었다. 이자에 대한 탕감은 어느정도 있으나 결국 원금은 1원도 면제 받지 못했다.

 

 

2018년 8월부로 국제통화기금과 유럽연합(사실상의 독일)의 그리스 경제 관리체제를 끝냈지만 경제사정은 여전히 좋지 못하고 이외의 부채에 대해서도 상환할 가능성 자체가 낮으나 서둘러 종결했다고 말이 많다.

 

그리스의 문제로는 대외의존이 큰 사업, 생산성의 부재, 비대해진 공공부문, 정치권과 NGO의 부패와 탈세, 과도한 국방비와, 유로존 문제, 지나친 연금과 복지 지출등으로 꼽고 있다.

 

그리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것인가 조차도 희박하지만

 

결국 그리스가 감내해야할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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